나는 아마 갱년기.

어떤 남자의 우울함 극복기

by nay

"넌 형 생일에 연락도 안 하고, 앞으로는 (축하한다고) 연락 좀 해라"


몇 년 전 12월 어느 날. 뜬금없는 공격에 당황스러움이 앞서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하는 복잡한 마음에 일단, 알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그날의 당혹감은 아직도 생생한데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연락과 이야기였기 때문이리라.


'그러는 자기는 내 생일이라고 축하한다 말 한적 있나'


전화를 끊고 대뜸 올라온 생각. 그도 그럴 것이 형이나 나나 서로 생일이라고 살갑게 축하하는 적 별로 없었던 까닭이다. 형과는 6살 차이. 만나도 별로 할 얘기 그리 많지 않은 데면데면한 사이. 그나마 중간에서 사람 좋은 형수님이 도련님 생일이라고 많이 챙겨 주신 것이 고맙다. 어쩌면 형의 입장에선 형수가 해주는 축하가 자기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봤을지도 모른다.


문득, 그런 형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최근 마음이 심란해서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 그날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앞서 말한 사건이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은 없지만 대략 지금의 내 나이와 당시 형의 나이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괜히 별 것 아닌 일에도 상처 받고 피해 의식이 생기곤 한다. 원래 뒤끝이 좀 있긴 했지만, 평소 같으면 넘어갈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 쉬이 용서가 되지 않는다. 특히 가족의 언사에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아내에겐 퉁명하고 아들에겐 짜증이다.


처음엔 코로나 블루가 아닐까 싶었다. 그 영향도 전혀 없진 않겠지만 전반적으로 무력감이 많이 쌓여 있다. 매일 의식적으로 운동을 하고, 재미있는 영상을 찾아보고, 책도 읽고, 글도 쓰지만 어딘가 모를 감정의 골이 깊다. 그 안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혹시 갱년기? 예전엔 여성만 갱년기를 겪는다고 했지만 남자도 그 시기가 있다고 한다. 마흔 중반이면 호르몬 변화가 충분히 일어날 때다. 거기에 코로나로 인한 활동 제약, 회사 일에 대한 불만족 등등 모든 요소가 겹쳐져 버렸다.


그래서 뜻하지 않게 이제는 형의 섭섭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

왜 갑자기 생일에 서운했을지 공감이 된다. 별것 아닌 일에 화내는 내가 싫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제어가 되지 않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사람을 만나기 싫은 기분. 이 시기가 빨리, 잘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다행히 오늘 아침, 산책길에 들은 이소라의 'Track 3'가 지친 마음을 달래 주었다.

미움이 그댈 화나게 해도 짜증 내지 말라는 그녀의 말.. 왠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울컥했다.


사랑이 그대 마음에 차지 않을 땐 속상해하지 말아요

미움이 그댈 화나게 해도 짜증 내지 마세요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우리가 가야 하는 곳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love is always part of me


너무 아픈 날 혼자일 때면 눈물 없이 그냥 넘기기 힘들죠

모르는 그 누구라도 꼭 손 잡아 준다면 외로움은 분홍 색깔 물들겠죠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우리가 가야 하는 곳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love is always part of me


...

여기까지 쓰고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아내에게 현재 당신의 남편이 이런 상태요! 하고 용기 내어 말을 했다. 그랬더니 아내는 심드렁한 반응이다.


"그런 거야? 늘 이 시기엔 자기 좀 우울해했잖아."


그랬던가? 갑자기 뒤통수를 두드려 맞은 기분. 내가 볼 수 없는 내 모습이었던 것인가.

늘 그랬었다는 말에 우선 놀랐고, 전에는 그걸 자각하지 못했단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마지막으로 '나 우울해'라고 말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아내에게 놀랐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쓰고, 아내에게 선포를 하고 난 후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휘몰아치듯 감싸던 우울감이 사라져 버렸다. 갱년기 어쩌고, 우울해서 저쩌고 했던 자신이 무색해져서 글을 포스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지금은 다행히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덕분에 지금의 이야기는 어쩌면 올리지 못한 채 서랍 속에 잠자고 있을 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오늘 내가 좋아하는 추세경 작가님의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를 읽었다. 그의 글을 보며 감정의 이유를 찾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과연 그의 말처럼 행복 속에는 비극의 씨앗이 숨어 있고, 절망 끝에서도 희망은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우울감의 절정에서 들었던 위로의 노래, 지나친 걱정과 염려보다는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 자각할 기회를 준 아내의 말, 남들 모르게 마음을 털어놓을 기회를 만들어 주는 글쓰기. 이 삼박자가 바닥을 치고 올라올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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