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회사를 다녔던 선배와 저녁을 먹었다. 언젠가 책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 존경하는 선배인 그다. 지금은 대학에서 교수로 잘 지내고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퇴사한 지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진짜 '순삭'이다. 그러나 10년이란 시간의 상대적 빠르기가 체감되기 어려울 만큼 이야기는 즐거웠다. 술 한 잔 마시지 않고 서너 시간을 맛있는 식사와 커피, 수다로 채우다 돌아왔다. 수다의 내용은 과거의 선배들에서 시작해서 현재 우리의 모습까지 이어졌다. 그는 스스로 허세라고 말했지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스마트한 사람임을 금방 안다. 배울 것이 많아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좋았다. 술을 하지 않는 나를 배려해 줘서 고마웠다.
다음 날 아침, 화장실에 앉아 어제의 만남이 줬던 즐거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다가 문득 내 삶은 미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명의 만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미생이란 말은 원래 바둑 용어다. 완전히 죽은 돌이 아니라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는 여지, 기회가 오면 다시 살아나 오히려 완생이 될 수도 있는 것. 만화 미생에서는 사회에 적응하는 주인공의 삶을 바둑돌의 미생으로 표현했다. 불현듯 마음속에 내 인생을 미생으로 판단한 것은 선배와 나의 사회적 위치가 자연스럽게 비교된 까닭이다.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를 부러워해 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애초에 남의 삶과 커리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인 편이다. 그런 나도 20여 년 전, 시기라는 것을 해 보았다. 대학원생일 때 형이 남양주에 아파트를 마련했다기에 구경을 갔다. 같이 집 안을 구경하며 나도 모르게 부럽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당시 아직 대학원생이었고, 여자 친구도 없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던 나에 비해 이미 회사 생활을 하고 있고, 결혼에 아이도 있고 이젠 집까지 마련한 형의 모습이 어쩌면 당시에 '완생'인 삶의 모델로 보였을 것이다. 그냥 무난하게 하나씩 갖춰 가는 형의 삶과 대조된 현실의 나를 부지불식간에 비교해 본 것은 아니었을까.
20년이 지나 선배와의 만남 이후에 가지는 미생의 감정은 형에게 가졌던 부러움과는 결이 다르다. 전혀 다른 누군가(선배)의 모습을 통해 바라본 나, 현재의 나에 대한 반추로 해석된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가 이제 마흔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가는 상황에서 '여전히' 미생인지, '아직은' 미생인지까지도 궁금해진다. 왠지 여전히라고 하면 늘 그래 왔던 것 같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부정적 느낌이다. 아직은, 이렇게 말하면 비록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완생이 될 것이란 희망적 느낌이 있다. 애써서 굳이 그것까지 정의하지는 말자.
지금은 형처럼 직장과 집, 가족이 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완생이 될 수 있을까? 바둑판에 놓인 돌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질지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 만약 중간에 포기하고 버리는 돌이 된다면 다른 곳에 새로운 돌로 시작하면 될 뿐이다. 미생의 미덕은 열린 가능성에 있다. 그러니 미생의 삶을 안타까워하지 말고 묵묵히 주변을 일구어 나가야겠다. 이제 나는 백세 시대에 고작 중간쯤 온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