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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티브 Antibes Jun 03. 2024

다시 도돌이표, 그래서 몬테로소 알 마레

그리고 나를 다시 만나다

 마나롤라(Manarola)의 꿈같은 일몰에 사로잡혀 현실을 잠시 잊었던 우리는, 결국 원래 계획과 다르게 5개 마을을 모두 섭렵하기로 결정했다.

 마나롤라의 일몰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고, 해서 문득 5개 마을의 모습과 개성이 모두 궁금해졌기 때문. 처음주터 모두 궁금하긴 했었지만, 5개 마을을 제대로 다 볼 수 있을까 하는 시간 투자 대비 효과에 대한 의구심이 호기심보다 더 컸었는데, 마나놀라 산책이후 호기심이 더 강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수기인 2월이라 관광객이 많지 않아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에 큰 무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도 있다. 비수기 여행의

큰 장점이기도 하다. 결국 첫날 여정이 전체 여정의 힌트를 준 셈. 자유여행은 일정을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설계해야 하는 부담감이 크기도 하지만, 그 때 그 때 날씨와 기호에 따라 일정을 말그대로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 술 더 떠서, 생각보다 온화한 날씨 탓에 해안 풍경이 환상적이라는 친퀘테레 마을을 해변 트레일로 연결하고 있는 길들을 따라 트레킹도 해보기로 했다.



 그 다음날 아침 라 스페치아에서 몬테로소 알 마레로 향하는 기차에 다시 올랐다.

 짧은 기차 여정이었지만, 기차 밖으로 간간히 지나가는 친퀘테레 풍경을 벗삼아, 예정에 없던 몬테로소 알 마레 인터넷 사전 답사에 심취했다.

- 몬테로쏘 알 마레는 친퀘테레 중 가장 큰 해변을 자랑하며, 그 황금빛 모래사장과 맑은 해변으로도 유명하다고.

- 유명한 해변이야 워낙 많겠고 그 규모도 제각각이겠지만, 나름 친퀘테레에서는 큰 해변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는데 직접 찾아보면 그 규모에 실망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단 다른 마을에 비해서는 모래사장과 해변이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어, 바캉스 시즌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고도 했다.

 - 해변이 가장 긴 마을이고, 덕분에 까페, 레스토랑 등 해변 인프라도 걸맞게 가장 잘 갖추어져 있어, 많은 친퀘테레 관광객들이 잠시 둥지를 터는 친퀘테레 여정의 시작으로 선택하는 곳이라도 했다. 우리는 라 스페치아에서 시작했지만, 여기도 괜찮은 여정의 시작으로 보였다.


 짧지만 집중력 있는 리서치의 결과는 '몬테로소 알 마레는, (친퀘테레의 시작을 어디로 볼지는 관점의 차이겠지만), 서쪽 끝에 위치한 마을이어서 이곳을 시작점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첫인상을 제공하는 마을이기도 하고 가장 규모가 큰 마을이어서 어쩌면 친퀘테레의 수도격인 마을'이었다.


 그렇게 몬테로소 알 마레 집중 스터디를 끝낼 무렵, 기차는 리오마조레(Riomaggiore), 마나롤라(Manarola), 코르닐리아(Corniglia), 베르나차(Vernazza)를 차례로 지나 몬테로쏘 알 마레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도돌이표처럼 친퀘테레 일정을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몬테로소에 몬테로소라고 적혀있는 기차역 간판이 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데, 플랫폼 사인을 보는 순간 다시 마음이 요동친다. 기차역을 나서 사람들을 따라 나서니 이내 해변에 다다랐다. 2월의 해변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모래 사장과 나름 긴 해변은 아침 햇살에 차분히 빛나고 있었다. 여름에는 실로 해변에 해수욕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르는 그런 해변이었다. 아직은 인산인해와 거리가 먼 한참 비수기인데다, 해수욕을 할만큼의 뜨거운 날씨도 아니여서, 간간이 해변 벤치에 지중해 아침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해변을 따라 산책을 시작하는 데 기차역에서 나선 위치가 해변의 중간쯤이어서 방향을 정해야했다. 문득 멀찌감치 거인 형태의 사람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듯한 묘한 조각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발길이 향했다.



 그 앞에 다다르니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거대한 작품. Il Gigante (거인)이라는 제목의 작품이라고 한다. 몬테로소 알 마레의 가장 독특하고 인상적인 랜드마크 중 하나라고. Il Gigante는 1910년에 건축가 프란체스코 레비(Francesco Levacher)와 조각가 아루고니니(Arrigo Minerbi)에 의해 만들어졌고, 원래 이 조각상은 넵튠(Neptune) 또는 포세이돈(Poseidon)으로 불리는 바다의 신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조각상은 원래 Villa Pastine이라는 화려한 빌라의 일부로 설계되었다고 하는데 바로 뒤에 빌라가 연결된 것이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14미터 높이에 달하는 이 거대한 석상은 당시 빌라의 테라스를 지탱하는 구조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여느 유명한 유럽의 많은 역사적 장소와 조각들 처럼 제2차 세계대전과 여러 차례의 폭풍으로 인해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여러차례 복원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여전히 일부는 복원되지 않은채로 남겨져 있는데, 모랄까, 아주 완벽한 작품의 형태가 아니어서,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친퀘테레의 모습과 오히려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라고 느껴졌다. 폭격을 맞아 손상된 이미지라기 보다는 바다, 자연풍경과 잘 어우러진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라고 해야할 것 같았다. 사이즈가 남달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도 충분했고, 해변가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수호신 같은 느낌도 들어 다소 지루할 수 있는 해변에 나름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오브제 같다고 해야할까.


 

 문득 세상의 모든 짐을 어깨에 받치고 있는 듯한 이 거대한 조각상이 그 동안의 나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하는생각이 스쳤다. 오래 시간 일하고 분주하게 달려온 나의 모습이 마치 굴레처럼 나를 감싸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이제 좀 내려 놓고 자유로와 질 수는 없을까. 아직 해야할 일과 산적한 많은 부담들이 현실과 공존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치 나를 제3자적 관점에서 관조하듯이 이 거대한 조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나를 마주한 순간. 많은 숙제는 여전히 남아 있고 남아 있을 것이지만, 묘한 자유함이 순식간에 나를 깜싸안았다. 지금까지 많이 수고한 나 자신을 잠시 다독이고 관조하는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다.




조각상과 멀지 않은 곳에는 어부들의 선박과 선박을 정착하는 포트, 그리고 산책용 데크와 레스토랑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몬테로소 알 마레의 긴 해변이 다른 친퀘테레의 마을에 비해 풍족한 인프라를 갖추게 하는 큰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것. 부동산은 결국 자연환경과 입지가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 아니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조각상을 뒤로하고 다시 천천히 저쪽 해변의 끝으로 발길을 옮겼다.  저쪽 해변의 끝에는 어떤 즐거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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