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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티브 Antibes Jun 10. 2024

'베르나차'로 Vernazza로 영차영차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산중턱 와이너리는 빼어난 해안 절경을 가끔식 보여주긴 했지만 거의 등산을 방불케 하는 고된? 나들이였다. 평소 산은 '바라보며 관조하는 것', '나무들이 모여사는 별동산', '가끔 밤줍거나 가을 단풍 구경 가는 곳' 등 내가 거처하는 곳과는 상관없는 큰 결심을 하고 방문하거나 혹은 멀찌감치 보이면 좋은 것 정도의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에 등산과도 아주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던 터라, 이런 계산식 와이너리를 따라 걷는 험한 나들이는 급격한 체력의 고갈과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훈련이었다. 처음엔 '아기자기 비밀스런 오솔길‘이었으나 이내 ’언제끝나 돌산길‘로 변모해 있었다. 난데없이 헨젤과 그레텔도 소환되시고 머리는 뒤죽박죽, 다리는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 마음의 간사함이란. 트레킹? 그것은 히말라야 등반 기세로 값비싼 장비와 땀은 밀어내고 방수기능은 탁월하다는 고어텍스로 중무장한 등산 전문가나 하는 것이란 선입견을 그대로 선입견인 체로 내버려두어야 했었다.


가끔 '나 여기 있어요' 하면서 얼굴을 보여주는 해안의 풍경 외에는 가도가도 끝없는 돌과 흙 그리고 나무들의 범벅인 산길인데다, 계단식 오르막길의 끝없는 연속이어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과연 잘한 결정이었을까?'하는 의구심이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오르막' '오르막' '오르막' 하면서 발바닥에서 소리가 나는듯도 했고, 이러다 이탈리아 해안 마을 어딘가에서 비명횡사하는 것은 아닌지 묘한 걱정도 스물스물 안개처럼 머리속에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오르막이 있으면, 또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내리막 길도 있는 법.

이내 내리막으로 접어들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금씩 내려가면서 '내리막은 쉽겠지?' 했지만, 왠걸. 내리막이 오히려 더 힘들고 위험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가뿐숨을 더 내쉬며 인내의 끝은 어디인지 시험에 드는 나 자신을 다독일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끼낀 돌산길이라 미끄럽기도 하고, 평소 안쓰던 근육을 써가며 기어가고 있었던 터라, 마치 스키타듯이 주루룩 미끄러지기도 하는 순간엔 가슴이 또 철렁. 중간중간 흙길이 나타나기라도 하시면 세상 반가울 수 없었다. 폭신폭신 쿠션이 그래도 다리에는 큰 위안이 되었던 것.



 지친 마음과 육체에 헛것이 보인 것인지, 그래도 평소 자기개발서로 중무장했던 기나긴 시간들이 헛되지만은 않았던 것일까. 꾸역꾸역 한걸음 한걸음 걸으면서, 순간 묘한 철학의 시간으로 안내되었다.

목적이 분명하다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 작은 성공이고, 그러한 조그만 성공이 나를 어디론가 안내하고 있으며, 그런 몸부림이 결국엔 쌓이고 쌓여서 큰 울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방향만 정확하다면,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나아가기 위해 또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언젠가는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것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런 묘한 울림이 어디선가 들리는 순간.


베르나차 마을이 또 멀찌감치 나타나, 기도의 응답이라도 받는 듯, 코 앞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파스텔톤의 향연이 레드카펫처럼 주욱 펼쳐진다.



투덜투덜 세상 불평불만은 모두 읊조리던 게 수 초 전이었었는데, 자기개발서를 모두 섭렵한 듯 쓰담쓰담하고 있는 나 자신으로 다시 변신에 변신을 거친다. 사부작 사부작 해안 마을을 뒹굴뒹굴 굴러도 될 것을 '왜 나는 괜히 이런 트레킹을 시작했나' 하는 자책도 어느 순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내 트레킹을 해야만 볼 수 있을 절경이 다시 별내리듯 쏟아지자,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과 작은 성취감으로 뿌듯함이란 엔돌핀을 만들고 또 만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전이 없으면 결코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는 법. 그리고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 그러나 끝을 보려면 시작도 반드시 해야하는 법. 다 알고 있던 이치였지만, 온몸으로 부대끼며 다시 체험하는 순간이라고 해야할까. 육체적 고통을 느끼며 움직이고 움직이는 순간만큼은 내가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내 몸뚱이와 발만이 보였고, 해서 쓸데없는 먼지같은 곰팡이와 같던 독버섯과 같던 잡념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순간 순간 내쉬는 작은 호흡을 그렇게 간절히 느끼는 것도 오랫만이라고 해야할 것 같았다.


 트레킹의 중후반쯤에 나타난 베르나차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명화를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획을 긋는 느낌으로, 파트텔 색색의 집들이 마치 계단을 이루듯 바다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고, 중앙 광장과 해안 포구에는 저마다의 모습을 한 사람들이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듯 했다.



 험한 트레킹이었지만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트레일처럼, 나의 육체와 정신이 순간 쾌속 열차를 타듯이 연결되고 단련되는 묘한 경험도 할 수 있는 인생 최고의 트레킹이었다. 단순한 트레킹이 아니라, 또 단순한 리프레쉬 휴가가 아니라,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 보고 또 살아갈 시간들을 미리 관조하는 또 다른 다짐과 약속의 시간들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이제 베르나차 마을을 찬찬히 뜯어볼 시간. 고된 트레킹 덕분에 배도 출출하고, 베르나차의 레스토랑은 또 어떤 한끼를 선사할 지 기대가 한껏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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