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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라잎 Oct 27. 2024

프롤로그: 고백

언젠가부터 나 자신에게 가혹하리 만큼 채찍질만 일삼던 나는,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아이에 대한 책임감까지 등에 업고 일 분 일 초를 쥐어 짜듯이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산후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미친듯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다 결국 번아웃(Burnout) 상태에 이르렀다. 치유되지 못한 산후 우울증에 번아웃까지 내게 찾아 왔던 어느 날, 나는 호기롭게 대기업 퇴사 후 창업한 나의 첫 회사 사무실에 놓아 둔 소파에 처음으로 누워보았고,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심각한 무기력증이었다. 

나는 말로만 들었던 그 무기력증이 그토록 무서운 것인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 당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아주 가까운 지인들에게 몇 번 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짠듯 하나같이 내게 ‘병원에 가서 상담을 좀 받아봐’라고 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한 것임에 분명할 그 말에 나는 기가 차다 못해 실소(失笑)했다. 숨 쉬며 누워있는 것도 귀찮은 사람에게 병원에 가보라니. 내게 상담을 받고 이 병을 고치고 싶은 마음 비슷한 것이라도 든다면, 그러니까, 그 정도의 의욕이라도 있다면 과연 내가 무기력증을 앓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무기력증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세상 가장 헛된 위로였다.


그 후로 나는 끝이 없을 것만 같이 길고 긴 우울과 무기력의 터널을 지났고,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이제 이전만큼의 활기와 의욕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코, 더 이상 내 자신을 몰아부치거나 나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는 않는다. 그것들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에 대해 나는 충분히 경험했고, 뼈에 새겼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일들을 계기 삼아 무기력증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물론 그 무기력의 기나 긴 터널을 하루 아침에, 어떤 하나의 계기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기적적으로 쌀 한 톨 정도의 의욕이 생겨났던 어느 날 한 번 했던 새벽 조깅이 그 시작이었을 수도 있고,

날이 갈수록 점점 사랑스러워져가는 딸아이의 모습이 매일 내게 전하는 행복감의 누적이 큰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한 가지 내가 확실하게 얘기할 수 있는 건,

쓰러져 주저 앉아있던 내가, 일어날 힘이 생길 때까지 그저 잠자코 기다리지를 못하고 그 와중에도 기어코, 재빨리 나를 일으켜 세우고자 그토록 찾아 헤맸던 소위 ‘뼈때리는’ 칼럼이나 동기부여 저서, 대단히 성공한 이의 ‘Just Do It’ 류의 채찍질 같은 강연 같은 것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드러누워있었다'는 표현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드러누운 땅바닥 표면에 찰싹 들러붙어 겨우 숨만 간신히 쉬고 있던 나를 일으킨 건 촌철살인의 말 한마디도, 인생 낭비하지말고 당장 일어나 달리라는 채찍질도 아니었다. 내게 그 천근같은 몸을 일으켜 다시 움직일 용기를 준 건 그런 자기계발서와 같은 것들이 아니었단 말이다.

채찍질은 달리는 말을 더 빨리 달리게는 할 수 있을지언정, 기력이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아 땅바닥에 드러누워있는 말을 일으킬 수는 없다. 달리기가 싫어, 달릴 힘이 없어, 또는 일어서기가 두려워 누워있는 말은 오히려 채찍에 맞아 빨리 죽어버리고 싶지 않겠나.


찬찬히 그 당시를 돌아보며 기억을 더듬어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 칠흑같은 어둠의 터널에서 내게 의욕을 주고 용기를 준 건 놀랍게도 '앎의 순간들'이었다. 완벽하게 사고형(Thinking) 인간인 나는(나는 전문 심리상담 기관에서 MBTI 검사를 진행한 바 있는데 나는 사고형(Thinking) 척도가 100%로 평가되었다) 내가 겪는 이 모든 현상들에 대해 ‘제대로 앎’으로써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었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다. 이와 관련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처음 경험했을 때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내 정신이 고장이 났다는 것에 대한 서글픔과 두려움이었다. 이 때 세상과 내 삶을 원망하던 나를 뇌과학 책이 위로해 주었다. 뇌과학 이론에 의하면 번아웃은 주로 뇌의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과 보상 시스템이 과도하게 작동하면서 결국 인지 기능과 감정 조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즉 뇌의 지극히 정상적인 메커니즘에 의한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뇌과학은 ‘열심히 살다가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으로 자기연민에 빠져 있던 나에게, ‘사실 너의 뇌는 미쳐버린게 아니라 정상 작동 상태야’라며 나를 다정히 위로해 주었다.


이후에는 금새 회복되지 않는 무기력증에 나는 다시금 나의 미천한 의지력을 탓하며 자책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이 때에는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Roy Baumeister)의 ‘의지력 소모(ego depletion)’ 이론이 내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의지력은 에너지와 유사하게 특정한 양이 주어져 있어서, 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점점 소모되어 힘이 약해진다. 수 십년 간 단 한 번도 나 자신에게 칭찬과 보상따위는 주지 않은 채 비난하고 채찍질만 일삼았던 나에게 의지력 비슷한 것이라도 남아있을 리가 만무하다며 심리학은 나를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 나의 의지력은 애초에 비루한 것이 아니라 소모품일 뿐이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나는 무기력증과 함께 처절하게 내 영혼을 뒤흔드는 깊은 우울감을 느끼곤 했다. 사실 우울증과 무기력증은 샴 쌍둥이와 같다. 우울하니까 기력이 없는 것이고, 무기력하니까 우울할 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체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까지 마음이 망가져버려 이토록 아픈걸까?’라는 머릿속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어 더없이 마음이 고통스러웠는데, 이 때는 의학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의학은 내게 너의 우울증은 장내 미생물 불균형의 큰 영향을 받으니, 매일 오후 2시에 밖에 나가 햇빛을 쬐면서* 프로바이오틱스(유익한 미생물)가 가득한 그릭 요거트를 퍼먹으라고** 말해주었다. 단순히 나의 우울감을 낫게 할 방법을 알려줘서가 아니라, 알고보면 이 깊은 우울의 원인이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라거나, 나라는 인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장 건강이 좋지 않고 유산균이 부족해서 그런 것 뿐일 수도 있다고, 결국 ‘내'가 아니라 ‘장’이 문제일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의학이 내게 ‘장 때문이야’라고 말해주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그 당시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그 어떤 위로의 말과는 비교할 수 없이 따스한 위로를 받았다.


나는 당시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긍정적 사고’, ‘감사 일기 쓰기’, ‘명상하기’ 등의 마음 챙김을 위한 노력을 하는 데 나의 얼마 없는 에너지와 의욕을 모두 사용했다. 그럼에도 쉬이 변하지 않는 나의 상태에 때로는 ‘이런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회의감에 빠져 더 깊이 괴로워하던 시기도 있었다. 이 때 나는 생뚱스럽게도 양자 역학에 관한 책을 읽고 극적으로 삶에 대한 지독한 냉소를 벗을 수 있었다. 양자 역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양자 얽힘(Entanglement)’은 아인슈타인 조차 ‘유령같은 원격 작용’이라고 칭한 현상으로 두 입자가 서로의 상태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 한 입자의 상태가 결정되면 다른 입자의 상태도 즉시 결정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두 입자가 공간적으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관측 시 순간적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 믿을 수 없이 놀라운 물리학적 현상을 알게 된 후, 에너지의 일종인 나의 생각과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되면 이들과 연결된 다른 ‘어떤 것’들의 상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것이라는 일종의 개인화된 믿음을 갖게 되었다. 물론 말 그대로 내가 만들어 낸 믿음에 불과하지만, 양자 역학에 의해 최근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와 같은 발상이 실제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토록 신비로운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한 ‘앎’을 계기로 내 자신의 모든 사고 회로와 삶에 대한 태도를 ‘긍정’과 ‘감사’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렇듯 나에게 있어 언제나 ‘아는 것’은 ‘위로’였다.


아이를 키우는 일상은 소위 ‘저 세상’의 행복을 주는 한 편 극한의 고통도 경험하게 한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불면의 고통,

쉴 새 없는 노동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하루에도 수백 번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내는 인내의 고통,

아이에 대한 다채로운 염려로 인한 불안의 고통 등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이 밖에도 다양한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되는데,

나의 지난 5년 간의 육아를 되돌아 보건대 그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다름아닌 ‘자책의 고통’ 이었다. 자책이 습관이 되어버린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자책하고 있었다.

아이가 분만 예정일에 한 참 미치지 못한채 태어난 것도,

아이가 너무 심하게 낯을 가리며 울기만 하는 것도,

아이가 이유식을 잘 먹지 않는 것도,

아이가 어린이집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것도,

아이가 어린이집 친구를 할퀴는 것도,

아이가 채소를 잘 먹지 않는 것도,

아이가 감기에 걸리는 것도,

모두 다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어 괴로워했다.

그런데, 아이에 대해 이런 자책감을 느끼는 부모가 이 세상에 비단 나 하나 뿐일까?


어느 날 갑자기 부모가 되어버린 채 아이를 키우면서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도 뜻대로 되지 않는 아이를 바라보며 ‘왜 좀 더 잘하지 못했는지’ 매일 밤 자책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부모로서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이고, 그로 인한 고통의 크기가 아이가 주는 행복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부모도 인간이기에 응당 위로가 필요하다.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치 않는 사람은 없고, 위로받지 못한 채 ‘더 잘하라’는 채찍질만 당한 결과는 내가 앞서 고백한 나의 이야기와 같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아이가 매 순간 내게 주는 말로 다 설명하기는 어려운 다채로운 영감에 벅차오름을 느끼곤 한다.

나는 이러한 아이가 주는 ‘영감’이라는 프리즘에 ‘아이를 키우는 삶의 본질’과, ‘부모의 자격’, ‘부모-자녀 간의 관계’, ‘가족의 소중함’ 등을 투과시킨다. 그리고 그 개념들이 프리즘을 통해 분산되고 굴절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색하고 통찰하고 공부한다. 그리고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앎'은 자칫 자책으로 점철될 수 있었던 나의 육아에 소중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 위로는 내가 주저앉지 않고, 더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노력할 힘과 용기를 주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받아온 위로를 그것이 필요한 모두에게 전하기 위해 이 책을 쓰고자 했다.


‘위로’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중에는 ‘comfort’가 있다.

그리고 이 comfort라는 단어의 주요 의미는 ‘안락’과, ‘편안함’이다.

결국,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은 그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상적인 육아의 순간에 대한 이론적, 감성적 통찰을 통해 감성과 논리가 공존하는, 

이 얼핏 기사같고, 한 편으로는 논문같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그저 촉촉한 감상에 젖은 일기처럼 느껴지기도 할 이 책이,

아이를 키워내느라 고군분투중인 당신에게 부디 ‘똑똑한 위로’가 되어주기를, 

그래서 당신이 조금이나마 ‘편안'에 이르기를 바란다.






* 햇빛은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하여 기분을 안정시켜 우울증 증세를 완화하며, 밤에는 멜라토닌 분비를 활성화하여 수면의 질을 높임으로써 우울증을 완화 또는 예방할 수 있다.

** 대장에 존재하는 수조 개의 미생물의 불균형은 기분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로토닌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생성을 방해해 우울증을 악화시킨다. 또한 장내 환경이 나빠지면 염증 반응도 증가할 수 있어 이로 인해 전신 염증이 유발될 수 있으며, 염증 물질이 혈류를 통해 뇌로 이동하면서 뇌의 염증 반응을 일으키고, 이는 우울증과 같은 정신 건강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따라서 특정 프로바이오틱스(유익한 미생물)은 장내 미생물 균형을 개선하여 우울증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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