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 Mar 26. 2024

모성애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번은 나와 따로 사는 부모님이 오랜 기간 집을 비우고 여행을 가셨다.


가끔씩 근처에 갈 때마다 하루 이틀 쉬면서 자고 오곤 했다. 화장실 물도 내리고 청소도 좀 하고.


그런데,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가니 집안이 엉망이었다.


도둑이 든 줄 알았다.


예전에 살던 집에 도둑이 들었던 경험이 있어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도둑이 들었다기에는 조금 어설픈 감이 있었다. 거실 쪽은 깨끗하고 작은 방 한쪽과 식탁과 주방 쪽이 집중적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허물 벗듯 남겨져 있는 옷가지들

먹다 남은 음식들


당연히 쓰레기통에 있어야 할 녀석들도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정처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아 이건 도둑 든 게 아니구나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이건 뭐지 라는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여행을 가기도 하고 집을 비우니, 놀리느니 월세 조금이라도 받으려고, 작은 방 한 칸 쓰라고 했어. 오래 집 비우면 안 좋잖아. 사람이 있어야 집도 좋아. 환기도 시키고 청소도 하고.“


아이고, 어머니.

집이 좋은 게 아니라. 푼돈 받으려다 집 쓰레기 되게 생겼어요.


옥신각신하다가, 내가 찍어서 보내 준 사진을 보고 더 이상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식탁 위에 먹다 남은 음식과 싱크대에 라면 국물이 그대로 있는 사진이었다. 여기저기 뒹굴거리고 있는 맥주 캔은 데코레이션.


그 친구 이름과 전화 번호를 받았다.


빨리 와서 정리를 하라고.

쓰기로 한 방이야 편하게 써도 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돼지 우리로 만들어 놓으면 되겠나)

식탁과 주방 그리고 거실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어떡하냐고

한 마디 하려고 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내가 치웠다.


허물 벗은 바지와 옷가지들을 그 친구가 쓰는 방에 밀어 넣을 때까진,


그래, 어린 친구니까


했는데, 먹다 남은, 더러운 음식물을 정리해서 밖에 나가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계로 가니 짜증이 치솟았다.


아무리 어려도 이 자식 너무하네.

남의 집을 싼 돈에 쓰면 양심껏 깨끗하게 써야지.

전화는 왜 안 받아.


그렇게 정리를 하고 하루를 보냈다.


이게 쉬러 온 건지 일하러 온 건지 쩝


정리를 하다 이 친구 어머니가 쓴 메모장을 우연히 보았다.


“우리 아들 성인이 되고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 엄마가 늘 우리 아들 응원할께. 파이팅!”




다음 날 오전.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웬 아주머니가 세입자인데요 했다.


문을 열어주니 남자 녀석과 아주머니가 대뜸 죄송하다고 부터 한다.


맞벌이 하면서 자녀가 여럿이다 보니 자신의 집도 이렇게 엉망이 되기 일쑤라고 한다.


정리를 했어야 했는데, 마침 갑자기 시간 맞춰 나가야 할 일이 생겨서 정리를 못했다는 핑계.


음식물 쓰레기 보니 하루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요.


하려다 말았다.


말을 들어보니 그냥 독립된 원룸을 얻어서 나가기로 했다고 하니, 어차피 안 볼 사람에게 비수에 꽂히는 밀을 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집 청소를 다 해뒀기에 아주머니와 녀석이 할 일은 짐 정리만 해서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녀석은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대뜸 문을 잠궜다.


자기도 쓰레기 더미들이 널려 있어서 발 디딜 틈 없는 자기 방을 막상 누군가 본다고 하니 부끄러웠나 보다.


한참을 챙기더니 나와서 가져온 차로 짐을 옮기려고 하길래,


“내가 어머님 하고 짐을 차로 옮길 테니, 너는 남은 짐들 정리해라. 빠진 것 없이.”


그렇게 일일 이사 알바맨이 되었다. 무급으로다가.


잠만 자고 가서 챙길 것이 많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며칠 살았다고 짐이 많았다.


원래 이사는 그렇다.

짐을 모조리 다 빼고 이사 가려면 짐이 많다.

어렸을 때 옥탑, 반지하를 전전하며 짐 싸고 이사해 본 기억이 났다.


그렇게 남의 집 이삿날이 되어버린, 내 휴일.


짐을 같이 나르면서 아주머니는 자꾸,


“우리 애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그날따라 사정이 있어서.“

라는 말을 반복하셨다.


녀석도 연신 죄송하다고 하고.

뭐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한번 사과하면 되었지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다.


마지막 짐을 싸서 가시면서도 죄송하다며 가셨다.


휴우~


짐을 다 빼고, 쉬게 되니 마음이 그제서야 편해졌다.


그러다 혹시나 하고 집을 둘러봤다.


빨래통에 녀석의 옷가지가 있었고, 딱 봐도 우리 집 물건이 아닌 것들이 눈에 띄었다.


급하게 짐을 다 정리해서 빼가려니 남는 게 있기 마련. 이래서 뭐든 여유 있게 시간을 갖고 하고, 다 하고도 check를 해봐야 한다.


바로 창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주머니가 녀석과 차에서 짐을 정리하고 계셨다.


“아주머니! 남은 짐이 있어요!“


황급히 불렀고, 짐을 갖고 나가려다 혹시나 해서 한번 더 둘러 보았다. 냉장고도 열어 봤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가족들은 먹지 않는 음식이 있었다.


다 챙겨서 나가려고 하니 아주머니가 기다리다 현관 앞으로 다시 오셨다.


짐을 인계하고, 수고하셨고 이사 잘 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데,


아주머니가 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시고는 돌아가다 멈칫 하고 한 마디를 하셨다.


“저기, 저희 애 전화 번호 지워주시고, 이름도 좀 잊어 버려주세요.”


살다가 그런 말은 처음 들어봐서 당황했다.


보통 우리 애 이름 기억해 주시고 잘 좀 봐주세요 라는 말은 들었는데, 아이 이름도 잊어 버려 달라고 부탁을 하신다.


안 좋은 일로 만났으니, 혹시라도 세상은 좁아서 다시 만났을 때 아예 모르는 사람으로 봐 달라는 뜻이었을 거다.


한 문장이 머리를 스쳤다.


“고슴도치도 자기 자식 새끼는 귀엽다.”


우리 어머니도 저러셨으려나.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학교에서 소위 짤짤이라는 동전을 갖고 하는 도박(?)을 하다가 선생님께 걸려서 많이 혼났고 어머니가 학교로 불려 오신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 연신 죄송하다고 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겠다고 하시며,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원래 그런 애가 아니라고 거의 빌듯이 말씀을 하셨다.


이건 좀 오버 아닌가 싶었지만, 잘못한 것도 있고 힘 없는 학생이라 잠자코 죄송하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와 이 아주머니가 겹쳐 보였다.


어릴 적 나도 실수로 이런 짓 해서 어머니 학교에 혹여라도 다시는 오시게 하는 일 없도록 해야지 했다. 녀석도 남의 집에서 자거나 살 때는 되도록 깨끗이 쓰고 어머니가 아쉬운 소리 없게 해야지를 느끼고 변했으면 좋겠다.


몇 달 이따 군대를 간다는데, 가서 고생 좀 하면 정신을 차리려나.


아주머니의 아들을 위한 간곡한 (?) 부탁과 진심 어린 눈이 기억에 남는다. 아들을 응원하는 메모지와 함께.

이전 28화 이강인의 사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