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말 좀 곱게 합시다.
얼마 전 남편과 같이 이미 종영된 <그 해 우리는>이라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여주인공이 중소 마케팅대행사의 팀장인 드라마였다. 주인공 직업 설정부터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지... 꽤나 유행했던 <대행사>는 대형광고회사를 다루고 있기에 약간을 멀게 느껴졌던 나에게는 진심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마케터라는 직업은 일반 사무직 중에서는 어찌 보면 좀 특별하거나 혹은 힙한 직업이라고 보이는지, 드라마 주인공이 마케터인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여주인공의 시련' 중 일부로 회사생활의 어려움이 나온다. 일은 잘하지만 냉철한 클라이언트측 팀장에게 이리저리 휘둘려 깨지는 중소 대행사의 엘리트 팀장. 항상 더 높은 기준과 퀄리티를 원하는 클라이언트는 당연히 어디에나 있기에 뻔한 이야기 같았지만, 몇 마디의 현실반영 대사로 드라마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프로젝트 오퍼 미팅에서 대행사 팀장이 PT를 시작한다.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클라이언트 측 팀장이 PT를 중단시키며 말한다.
"더 들어봐도 별거 없을 것 같은데, 계속하실 건가요?"
"기대 이하인데요. 모르겠으면 미리 물어보셨어야죠. 저흰 그런 뻔한 거 하고 싶은 게 아닌데 말이죠."
"실망할 만큼 책임감 없고 한심한 사람은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행히 좋은 아이디어 하나로 구사일생한 여주인공의 대사가 이어진다.
"10년이 흐른 지금, 제가 이딴 말을 들으면서 살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상황은 그야말로 흔하다. 실제로 저런 비슷한 경험을 한 적도 있기에, 해당장면을 다시 생각해도 몸이 오싹하다. 준비가 미흡했거나 문제가 있었던 상황이었을 땐 미리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기에 오히려 좀 나았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있는 상황이 아님에도 저런 말들을 들은 적이 있고 그럴 땐 그저 인신공격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마지막엔 다시 잘해봐야죠 라며 일을 다시 해오라고 독려하는 클라이언트가 악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해당장면을 보며 불과 몇 개월 전 클라이언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어떻게든 회사의 제안을 잘 설명하려고 노력한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때 남편이 헛웃음을 지으며 물어왔다.
"근데 솔직히 실제로 저런 일까지는 없지 않나?"
나는 순간 남편이 내가 '저딴 말'들을 얼마나 들어왔는지 모르다니 개탄하며, 댐의 둑이 터진 것처럼 내 얘기를 뱉어냈다.
"아니, 저거 진짜 현실이라니까!!! 난 더 심한 말도 많이 들어봤어. 돈을 내는데 돈값을 해라, 우리가 이딴 거 하려고 마케팅비 쓰는 줄 아냐, 내가 해도 이것보단 낫겠다, 잘한다고 추천받아서 기대했는데 너무 실망스럽다. 돈 쓰는 사람이라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줄 안다니까, 참내 진짜 본인들도 그냥 회사월급 받는 직장인이면서 왜 저런 식으로 말했는지 모르겠어. 똑같은 피드백을 해도 똑바로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꼭 자기들도 일 못하더라!"
실제로 모진 말들을 들은 날엔 회사동료들이 다 같이 기죽지 않도록, 그들 앞에선 별 것 아니라는 듯이 해결하면 된다고 툭툭 털어내고 웃음 지어야 했다. 여느땐 팀원들과 같이 맘껏 욕을 해댔지만, 이것 또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상대방이 회사 내에서 피해야할 기피고객사가 되거나, 담당팀원이 그를 정말 많이 싫어하게 되면 인력배정을 새로 해야 하는 어려움이 생긴다거나, 상대 담당자에게 감정을 담아 응대해서 회사로 컴플레인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저런 말을 들었을 때 이런 식이면 우린 일 못한다고 프로젝트를 뒤집어엎는 쇼를 할 수 있는 회사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저 괜찮은 척 참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남편에게 미주알고주알 불만을 토로해 보지만, 그래도 저런 문장 한마디 한마디까지 전하지는 않는다. 일하면서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래서, 마음속에 응어리져있던 댐이 터졌나 보다.
저런 뾰족한 말들에 숨이 차고, 심장이 쿵쿵 뛰다 못해 곧 터질 것 같았던 그 나날들.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감정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되뇌고 되뇌었던 날들이 삐죽 튀어나왔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의 태도가 상대방의 태도를 결정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을의 상황에서 평범한 실력으로 이 전장을 누비다 보면, 내 믿음은 자주 깨졌다.
내가 친절하게 말하면 저 사람도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겠지?
아니다. 저런 사람들은 웃는 얼굴로 사근사근 비꼬는 말을 꺼내어 뺨을 때리더라.
그들이 나, 나의 팀원 혹은 회사를 대상으로 뱉어댄 말들과 내가 하고 싶었던 대답을 몇 개 적어내며, 마음속 응어리를 이 글에 버려야겠다. 그들의 제스처, 말투, 표정까지 담아낼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 왜 아직도 그 모습들이 이리도 쉽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근데 돈 받으면 이 정도는 해줘야 되는 거 아니에요?"
→ 돈 받으면 네가 싼 똥까지 치워줘야 되냐...
"내 말을 이해를 잘 못하는 것 같은데"
→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먼저 정리를 해봐.
"좀 바빠서 그런데 짧게 얘기해 주시겠어요?"
→ 나도 바쁜데 그럼 빨리 피드백을 좀 줘^^
"다 문제없이 잘 운영했다는 거 알겠는데 그게 끝이잖아요? 좀 특별한 거 없어요?"
→ 네가 손댈 필요도 없게 정리했는데, 위에 보고할 것까지 만들라는 거지?
"근데 솔직히 이 회사 왜 다녀요?"
→ 응, 당신 같은 동료가 없다는 게 감사해서 다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