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심리에서 시작된 반칙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빠질 수 없는 단어는 필시 '야근'이렸다! 업무의 양 자체가 많은 것도 있지만, 피드백을 받고 그에 맞춰 수정보완 해야 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다 보면, 몇 시간씩 훌쩍 지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럼 원래 계획보다 퇴근시간이 늘어지는 게 익숙하다.
이렇게 야근이 많은 회사의 가장 중요한 복지는 야근식대와 교통비 지원이다. 중식지원이 되는 중소기업은 거의 없어도, 야근식대를 지원해 주는 곳은 그나마 좀 있을 것이다. 야근이 많은데 야근식대까지 지원을 안 해준다면, 많은 직원들은 기본적인 대우도 못 받고 있다고 느낄게 뻔하다.
회사원뿐만 아니라 모든 노동자에게 '끼니'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가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고 일하자"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듣는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야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야근식대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실제로 야근식대를 사용하는 직원은 굉장히 적다. 나 또한 웬만하면 야근식대를 사용하지 않는 직원이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늦은 퇴근시간을 더 늦추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엔 야근이 예정되어 있으면 빠르게 배달을 시키거나,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오는 직원들도 갈수록 밥 먹는 시간을 아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퇴근하는 성향으로 바뀌어 갔다. 물론, 대놓고 밤 12시 정도까지 야근이 예정되어 있다면 아예 단체로 저녁을 주문한다. 개인업무로 2-3시간 정도 추가근무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갈수록 많은 직원들이 끼니를 놓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야근으로 인해 늦게 귀가하면서 라면, 감자튀김, 편의점 김밥, 도시락 같은 음식들을 많이 먹게 되었다. 열심히 일하고 집에 도착하여, 술과 함께 급한 한 끼를 때우고 나면 기분이 굉장히 안 좋아졌다. 순간 내가 뭐 하려고 이렇게까지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상실감도 크게 느껴지곤 했다. 또한, 회사에서 준다고 한 지원금도 쓰지 않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내가 저녁을 먹지 않는 분위기를 선동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팀원들이 저녁식사를 배달시킬 건데 같이 주문하겠냐고 물어보면, 나는 열에 아홉은 그냥 빨리 끝내고 가겠다고 같이 주문하지 않았다. 그리곤 그들보다 더 늦게 퇴근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몇몇 팀원들도 혼자 배달을 시키거나 급하게 먹고 일하느니,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편하게 먹자는 생각이 들게 되었을 수 있다.
솔직히 15분-20분 정도 밥 먹는 시간을 줄인다고 퇴근시간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실 난 그저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저녁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점심은 대충 먹거나 굶더라도, 집에서 TV를 보며 편안히 저녁을 먹는 시간을 포기하기 싫었다. 저녁까지 회사에서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도 마음을 고쳐먹고 팀원들에게도 야근식대 사용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콤한 야근식대 사용법'이 생겼다.
'달콤한 야근식대 사용법'의 전제는 우리의 퇴근을 늦추면 안 되고, 밥을 회사에서 먹는 게 아니어야 한다.
"야근이죠? 저녁 시킬래요?"
"아니에요! 그냥 빨리 마무리하고 가서 먹을래요!"
"금방 끝날 양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할 수 있어요. 아니! 꼭 할 거예요!!!"
"그럼, 우리 지금 배달시켜 놓고 집에 가져가서 먹어요."
"네...? 그래도 되나요...?"
"에이, 이렇게라도 하죠! 집에서 편히 먹고 싶어서, 밤 10시까지 배고파도 참는데!"
그렇게 우리는 '야근 후 집에서 즐기는 저녁 복지'를 누렸다. 김밥, 샐러드, 케밥, 비빔만두 같은 식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주문해 놓았다. 몇 번 집으로 저녁을 가져가서 먹는 사람들이 생기자, 집에 가서 먹어도 맛있는 음식들을 서로 추천해주기도 했다. 일을 하다가 생각보다 시간이 더 늦어지면, 그냥 집에서의 식사는 포기하고 미리 주문해 놓은 음식들을 하나둘 꺼내서 배를 채우기도 했다.
야근식대 사용규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밤늦게 집에서 대충 때우는 편의점 음식으로 상실감이 느껴지지도 않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다 보니 최소 배달금액을 채우지 못해 혼자 주변 식당으로 향하거나, 몇 명에게 같이 배달시킬지 물어보다가 결국은 저녁을 대충 포기해 버리는 직원들도 조금은 줄어들었다. 아마도!?
(물론, 이런 방법을 악용하여 야근식대 지원 기준에 미달하는 추가근무를 하고도 음식을 집으로 챙겨가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돌아보니 내가 이런 '달콤한 야근식대 사용법'을 즐기기 시작한 건 회사의 분위기 영향이 컸던 듯하다.
직원들이 야근을 하고 있으면 7시부터 "저녁 먹고 해!!!"라고 소리치고 가시는 이사님, 어색하게 배달앱을 켜고 오셔서 다 같이 저녁을 주문하자 하시는 대표님까지. 일을 대신해 줄 수는 없어도 절대로 밥은 굶지 말고 일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는 그들의 행동들 때문이다.
무수히 많이 건너뛴 점심식사, 또 무수히 많이 참아온 회사에서의 저녁식사. 일하다 몸도 마음도 지칠 때면 가장 먼저 억울 해지는 건 '왜 밥도 못 먹고 일하지'라는 생각이다. 야근식대로 도시락을 시켜놓고 집으로 가져가는 것은 어쩌면 '반칙' 혹은 '꼼수'이다. 그래도 이런 '달콤한 꼼수'가 없었다면, 내 행복한 저녁식사 힐링타임을 지킬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