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장기간 정착해서 살다보면, 내가 이 곳에 적응했구나 혹은 녹아들고 있구나 라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집이던 회사이던 반복해서 걷게되는 길, 몇군데 돌아가며 방문하는 식당, 매일 아침 커피 한잔 테이크아웃 하는 카페, 습관처럼 들르는 편의점과 같은 단골집들이 생겨갈 때가 그렇다. 꼭 10년 넘은 단골집이 아니어도, 사장님이 날 기억하고 인사를 나누는 단골집이 아니어도, 내가 자주 방문한다는 것 만으로도 익숙함이 위안 그 자체가 되는 곳 말이다.
우리가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느끼는 낯선 곳에 대한 떨림이 설레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때 모든 행동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떨림'은 어쩌면 '어색한 떨림'과도 종이 한 장 차이이다. 해외에 정착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매일 여행인 것과도 같기에 그 어색함과 절대 헤어질 수 없다.
경험 상 해외라고 더 어색하고, 한국이라고 덜 어색한 것은 아니다. 13년의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던 27살의 나는 모든 것이 어색했다. 남편이 자리잡아 놓은 집부터 동네의 골목골목까지. 20대 중반이 넘은 한국인인데 이 동네와 식당들을 어색해한다는 것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고, 남들이 보기에 내 행동이 어색하지는 않을까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이상한 행동도 자주 했었다. 결국, 국가을 떠나서 어디든 내가 익숙한 곳이 아닌 곳에 뚝 떨어진다는 것은 나를 아는 사람과 내가 아는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는 굉장히 생소한 경험이다.
중국에서 한국에 돌아간지 5년만에 나는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오게 되었다. 그때와는 많이 다르다. 피를 나눈 여동생도 나를 돌봐주는 후견인도 없다. 하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남편과 10년간 친구처럼 동생처럼 정을 나눈 반려견이 있다. 그래서 프랑스 남부 어느 도시로 온 몇 주간 그들은 나에게 우주였다. 세상엔 그들과 나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들은여전히 나의 우주이다 ㅎㅎ)
어색하지만 발을 떼어 걸으며 그냥 산책하는 사람인 것처럼 몇번이고 같은 곳을 멤돌았다. 제대로 가만히 서서 문 밖에 나와있는 식당과 카페의 메뉴판을 보고 있으면 점원이 와서 말을 걸까봐 무서웠다. 그래서 우습게도 계속 같은 곳을 지나치며 몇일에 걸쳐 내가 조금 마음 편히 쉬거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탐색했다. 이 식당은 커피만 한잔 시켜서 앉아 있어도 되는 곳인지, 혼자 노트북을 켜서 시간을 보내도 되는 곳인지, 강아지와 함께 앉아 있어도 되는 곳인지, 앉아서 주문하는지 내가 계산대로 가야하는지 등을 탐색하며 가장 내 조건에 맞는 곳을 추리고 추렸다.
그렇게 나에게 점 찍힌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식당이자 펍, 아침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 내내 문을 열어놓고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유리문으로 된 벽까지 열어제쳐 거의 야외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혼자 자리잡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고, 매장도 넓어서 앉아있는 동안 점원이나 사장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보였다. 프랑스에 온지 무려 3개월만에 나는 그 집에 처음 방문했다.
"영어 할 줄 아세요?"라는 프랑스어만 간신히 장착하고, 뻘쭘하게 앉아서 기다리니 곧 젊은 남자점원이 메뉴판을 건넸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고, 노트와 책 한권을 펼쳐놓고 2시간을 보냈다. 누구도 관심가지지 않고, 더 필요한 것이 있냐며 재촉하지도 않았다.
찾았다, 단골이 되고 싶은 집!
그 이후로는 용기가 생겨 일주일에 한두번씩 그 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커피도 시켜보고 다양한 종류의 생맥주도 시켜봤다. 이 곳 저곳 자리도 새로운 자리를 탐색하며, 내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자리도 찾았다. 반려견과 함께 방문하면 물을 가져다 줘서, 점원이나 사장과 한번 더 얼굴을 보며 인사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몇번 방문하다보니 그들도 나를 알고, 우리 반려견도 기억하게 되었다. 그 이후론 남편과 그 가게앞을 지날때면, 나 여기 단골이잖아~라고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도 한다.
(처음 방문했던 날, 내 테이블에 있는 커피 사진을 찍는 것도 어색해서 눈치보며 몇초만에 빠르게 찍고 핸드폰을 내렸었다. 참 많이 발전했다!)
한번 만든 나만의 단골집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올 여름 새로 생긴 젊은감성의 카페, 직원들이 영어도 참 잘하고 한국에서 먹던 느낌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 자주 방문하곤 한다. 내가 방문하는 시간마다 알바 교대를 하는데, 젊은 커플이 근무를 시작할땐 꼭 우리 강아지에게 와서 처음 본 듯이 인사를 하고 물을 주고 간다.
집 주변에 있는 야외 수영장은 흔히 말하는 고인물 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10회권을 끊어 입장할때마다 카운터 직원과 반갑게 인사하고, 데크체어를 빌린다는 영수증을 들고 안전요원에게 다가간다. 당당하게 영수증을 내밀고, '가든'지역에 의자를 놓고 싶다고 말한다. 그럼 그들은 내 빨간 수영복을 기억하고, 내가 자주 지정하는 자리로 의자를 들고 온다.
동네에 있는 유일한 시장, 그 곳에 있는 빵집, 와인가게, 야채가게도 일주일에 한 두번 들른다. 나를 특별히 알아보고 인사를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번 보니 이제는 이 동네 주민이라고 인식한 것 처럼 나를 응대하는 행동이 매우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남프랑스 사람들이 북부 프랑스 사람들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여유롭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처음엔 관광객이 워낙 많이 오니, 나를 아시아 관광객으로 보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걸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하지만 요즘은 '상업적으로 탑재된 친절'이 아니라, 그냥 여유롭고 밝은 성향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진짜 친절함'이 서서히 느껴지고 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자주가는 장소가 생기고, 서로 인사하는 이웃이 생긴다는 것으로 완성되는 듯 하다. 어릴 땐 해외에서 학교도 다니고, 외국인이면 그저 신기해하며 반겨주던 환경에서 지냈던 터라 너무 자연스럽게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래서 내가 자주가는 단골집을 만들고 서로 기억하는 관계가 생긴다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일인지 몰랐다.
서른이 넘어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내 단골집을 만들어 가는 기분은 그 어느 성취감보다도 알차고 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