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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Apr 16. 2021

자살에 대한 고찰

은래빛 에세이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는 것을 본인 의지로 결정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일까?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유혹적으로 다가온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평생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아간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교통사고나 추락사고, 살해 등과 같이 갑작스럽고 끔찍한 경위가 아니더라도 언제나 죽음은 우리들 일상의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이 가진 공포는 단순히 ‘결론적인 죽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공포도 크다.

'어둠이 무섭다’, ‘높은 곳이 무섭다’와 같은 공포의 감정도 그 감정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근본적으로 죽음 또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맞물려있다.


물론 사람은 단순하지 않고 생각과 감정, 사회성, 인정과 사랑에 대한 욕망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 이외에도 외로움에 대한 공포, 사랑받거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로 인한 두려움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공포가 근본적으로 나 자신의 육체적/정신적으로 온전한 존재에 대한 유무, 즉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에 달한다.

매일 뉴스나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서 어디서 누군가 자살을 하였는데 시체가 부패한 지 몇 달 후에 발견되었다는 내용도 심심찮게 들어볼 수 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스스로 죽이게 만든 것일까?


경제적 어려움,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인 보장제도의 부재, 오랫동안 앓아온 정신질환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자살의 요인 또한 ‘공포’라고 생각한다.


바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앞지르는 순간, 그들은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본인의 의지대로 되는 경우가 드물다.


부모에 의해 태어나는 것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으며, 경제적/정서적인 가정환경, 부모님의 인성, 형제 관계 모두 본인이 통제할 수 없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인성의 부모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크는 사람도 있는 반면, 태어날 때부터 고아이거나 경제적으로 빈곤하거나,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성인이 되고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어야만 본인의 의지대로 삶을 조금씩 통제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짧게는 20년에서 길게는 30년 이상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사람이 경제적인 능력을 가진 후의 인생을 살펴보면, 돈을 모으고,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면서 본인의 의지대로 인생을 통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선택들이 더욱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삶의 굴레 안으로 밀어 넣는 형국이 지속된다.


즉, 본인의 노력과 선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그 가정을 일구어가고 책임지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활동을 멈출 수 없다.


돈을 벌기 위한 활동은 인간에게 갖은 스트레스를 주고, 더 이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선택은 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되뇐다.

‘하.. 내가 이렇게 사려고 이 고생을 하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너무 힘들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 그럼 주택대출금 상환은? 자녀 교육비는? 당장 무얼 먹고살지?’


이렇게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통제할 수 없는 환경”과, 본인의 선택으로 인해서 “통제할 수 없게 된 환경”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소모하는 인생을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나는 한때 자살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떤 방법이 가장 죽기 쉬울까?’,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생각들이 몇 날 며칠간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당시 내 삶이 죽을 만큼 힘들었느냐, 솔직히 그건 아니었다.


물론 나는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만큼 유명한 대기업에서 약 10년째 근무하며 쩌들 대로 쩌들어 있었고, 상사는 개또라이였으며,


아이는 자폐성 장애 1급으로 판정을 받았고, 시부모는 아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돈을 더 달라, 아이가 아프니 둘째를 하루빨리 낳아라 간섭하며 나를 힘들게 했었다.


아니, 다시 이렇게 나열하며 적어보니 죽을 만큼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젠장.


당시 나는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했다기보다는 인간으로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철학적인 질문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난 ‘행복하게 죽는 방법’에 대해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며 혼자 골몰하여 연구했는데, 혼자서 생각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친한 주변의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서슴없이 물어댔다.


“있잖아, 요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내가 이렇게 물으면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 요즘 많이 힘드니? 그런 생각하지 마.. 우울은 마음의 감기 같은 거야 힘내자!”

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응, 내 생각에는 목매달아 죽는 게 제일 괜찮은 거 같아. 목이 꿀꺼덕 하고 넘어갈 때 굉장한 쾌감을 느낀다잖아. 특별히 무언가를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도 있고.”

와 같이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중 가장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많이 되었던 프로포폴 주사에 대한 것이었는데, 일부 연예인들이 수면유도 및 피로 해소를 위해 불법적으로 사용해서 문제가 되었던 수면마취제였다. 이 주사를 용량을 기준치보다 과다하게 맞으면 편안하게 잠들듯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의료계 종사자가 아니었으므로 그 주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뿐더러, 왠지 그 답도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


어느 날 저녁, 남편과 나는 퇴근길에 만나 집 근처에서 막걸리 한잔을 하게 되었다.


집 앞에는 잔치국수와 돼지고기 숙주볶음, 파전 등을 파는 소담스러운 막걸릿집이 있었는데 우리는 종종 거기서 간단한 저녁 겸 술 한잔을 하곤 했다.


파전과 삶은 꼬막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는 남편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오빠, 요즘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인간이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그는 막걸리를 마저 한 그릇 다 마시고 파전을 찢으면서 말했다.


“.. 내일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야지.. 내일은 커튼을 빨아서 말려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잠들어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겠지. 사람이란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면 절대 행복할 수가 없거든”


나는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는 나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며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상대적으로 쉽게 죽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말해주지도 않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몰랐을 때에만 행복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말한 것이었는데, 과연 나에게는 납득이 되었고, 신기하게도 며칠간 나를 괴롭히던 ‘행복한 죽음’에 대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이 보였다.


죽고 싶으면서도 고통은 싫어서, 죽고 싶다면서 행복을 찾고 있던 이율배반적인 나 자신이.



***


살아볼수록 인생은 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별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죽을 듯이 공부하고, 치열하게 일하고, 돈을 좇고, 성공에 대해 열망하고, 자식에게 집착하지만 원하던 것을 이루면 항상 다음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관문을 넘어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늙어버린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버티게 해주는 것은 뭘까?


답은 식상하지만 아마도 ‘행복’ 일 것이다.


“전 행복하지 않아요”, “사는 낙이 없어요”,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이런 말들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과연 행복한 삶이란 뭘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고 인정받는 것, 하고 싶은 취미생활을 마음껏 하는 것, 가족들과 건강하게 오순도순 사는 것 등 행복의 형태는 다양하다.


그냥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생이 별 것이 아니듯, 행복도 별 것이 아니다.


오늘 내가 맛있는 연어덮밥을 먹었다면 그것이 오늘의 행복이다.


연어의 살이 부드럽고 맑은 선홍색을 뗬으며, 생와사비와 묽은 간장의 조화가 기분 좋게 내 혀와 코를 톡 쏘아주었다면 그게 바로 연어덮밥의 형태를 한 행복이다.


내 아이가 나를 보고 머루 같은 눈동자와 장난기 있는 입매로 웃어주었다면, 그것이 오늘 나의 행복이다.

문득 ‘아, 바람이 시원하네’, ‘오렌지 맛있겠다, 어서 집에 가서 남편과 같이 먹어야지’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오늘의 행복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막연한 미래의 큰 행복을 위한 목표로 달려가느라, 너무 바쁜 현실에 치어서 그런 별 것 아닌 행복들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간다.


그런 작은 퍼즐 조각 같은 행복을 놓치다 보면 나의 퍼즐판은 텅 비게 되고, 어느 순간 본인이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별거 아니고, 행복이 별거 아니듯, 죽음도 별게 아니다.


뭔가 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큰 사건이 일어나야만 죽음이 찾아올 것 같지만, 언제든 죽음은 찾아올 수 있다.


지금의 나 자신과, 가족과, 평생을 노력해 이루어 낸 모든 것들을 순간의 죽음으로 모두 잃을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내 아이의 웃음이, 연어덮밥의 선홍색이 오늘의 행복이라는 것을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나는 맨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 ‘스스로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유혹적으로 다가온다’라고 말했다.


어떤가? 유혹적이지 않은가?

삶이 힘들어 가볍게라도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나의 삶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주체적인 선택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난 내가 자살을 할 경우 나의 시체를 누군가가 수습해야 한다는 게 싫다.


그리고 아마도 자살을 하면 경찰에 신고가 되어 기사가 날 것이고, 유족의 의사에 따라 부검을 하니 마니 할 것이다. 그건 참 엿같은 일이다.


나는 대학생 때 작가 J.D샐린져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고 여관에서 호기롭게 콜걸을 불렀지만 입씨름이 생기며 돈만 뺏기고 얻어맞는 굴욕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주인공은 충동적으로 여관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를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길을 지나가는 멍청한 행인들에게 내 시체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내 맘에 쏙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만약 자살을 하면 일상 속에서 느끼는 ‘별 것 아닌 행복’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별 것 아닌 행복’은 무수하고 다양한 형태로 불시에 아주 짧게 찾아오기 때문에, ‘주체적인 한 번의 선택’으로 그것들을 모두 포기하기에는 매우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


그래서 어딘가 누군가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면 난 말해주고 싶다.

이해한다고, 그것 참 멋진 선택일 수 있다고.


근데 그전에 자살 후 나의 시체에 대한 엿같은 상황과 앞으로 날 기다릴 무수한 찰나의 행복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말이다.





아참, 내일은 연어덮밥 먹느라 못 먹은 곰치탕을 먹어봐야지.


옆에서 누가 뜨끈한 국물을 후루룩 마시고 크어~ 하는데 자꾸 눈길이 가더라고.



내일은 곰치탕이다!





<자살에 대한 고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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