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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Apr 22. 2021

연극배우의 꿈

은래빛 에세이


나는 연극을 정말 좋아한다.


연극을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보다 연극을 직접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사람이 직접 현장에서 눈물과 땀을 흘리며 연기하는 연극만의 매력이 너무나 좋다.


대학교 1학년 신입생 때였던 19살, 교내 연극동호회에 지원을 했다.

오디션을 보고 합격해야만 입회할 수 있었는데, 당시의 오디션 과제는 이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산을 오르다가 절벽에서 발을 헛디뎠습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남자 친구가 아슬아슬하게 내 손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올라갈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고 남자 친구에게 어떤 말을 할지 연기하는 것이 오디션의 과제였다.


나는 그때 팔을 뻗어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곧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절박한 순간이라고 생각하자, 팔이 바들바들 떨렸고 입술도 바들바들 떨렸다.


".. 난 아무래도.. 여기서 죽을 거 같아...

이 손.. 놓지 않을 거지..? 날 사랑한다면.. 같이 떨어져 죽어줘.."


곧바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그 오디션에서 1등으로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들은 나는 개나리가 가득 피어있는 교정을 와아아아악 소리 지르며 달려갔었다.

그때 내 마음은 마치 풍선처럼 훅 부풀어 날 위로 밀어 올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연극동호회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내 연극동호회는 밤 12시까지 연습, MT 참석 등 많은 시간 할애를 요구했고, 보수적인 가정환경 속에서 부모님의 이해를 구하지 못했던 나는 동호회 선배들과 갈등을 겪게 되었다.


결국 나는 공연을 위한 배역 캐스팅에서 최종 누락되면서 그 동호회를 탈퇴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귀여운 청춘의 고민일 뿐이지만, 당시의 나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는 다른 전문 극단을 찾아가 연극배우의 삶을 살고자 오디션을 보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에게 크게 꾸중을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나를 야단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이 짧고 허망한 거야... 그런데 남의 흉내나 내며 연극을 하다니..


그건 꿈속에서 꿈을 꾸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얼마나 허무하냐!

남의 흉내 내지 말고 니 인생이나 잘 챙겨라!"


연극배우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대들었던 나는 아버지의 그 말을 듣고 설득되고야 말았다.


난 연극을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남들의 시선을 견디며 가난한 예술가가 될 용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


4년간의 대학생활을  보내고, 난 졸업 전에 공채에 합격해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 '평범하면서도 그럭저럭 괜찮은 삶'의 반열에 올랐다.


회사를 다니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마음속에 꾹꾹 눌러두었던 연극을 하고 싶다는 열망은 식지 않았다.


일을 하다가도 연극을 하고 싶은 열정이 너무 끓어오를 때에는 '연극배우 모집글'을 보고 제출하지 못할 지원서를 써보거나,

마구잡이로 대본을 출력해 혼자서 소리 내어 읽어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제 와서 직장을 그만두고, 나의 보살핌이 필요한 내 아이를 두고 연극을 선택할 용기는 더욱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연극배우로서의 시간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 때도 과내 소모임 연극동호회를 통해 2년간 주연으로 공연을 올렸었고, 회사원이 되고 나서도 '직장인 연극동호회'에 입회하여 1번의 공연을 올렸다.


하지만 아이를 갖고 출산을 하게 되면서는 더 이상 동호회 활동을 지속할 수 없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한 갈망은, 몇번의 공연을 올렸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았다.


대본 안에 원했던 배역을 맡게 되었을 때의 기쁨, 배역의 심리상태와 자라온 배경을 고민하며 적어보던 날들,


이 대사를 이런 느낌으로 읊어보면 어떨까?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속삭이면 어떨까?

아니야, 오히려 상대방을 외면하면서 짓씹듯이 말하면 어떨까?


작품 속의 배역에 푹 빠져 몰입했던 그 행복감과 성취감은 마치 중독성을 가진 그 무엇과도 같아서,

하면 할수록 더욱, 다음 작품을, 다음 공연을, 다음엔 이런 배역을 더 갈구하게 만들었다.


***


그날은 매우 힘든 하루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답답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힘들고 힘들었던 큰 이슈가 마무리되어서 일찍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바로 망설임 없이 서둘러 대학로 연극 공연을 예매했다.

6시가 되자마자 회사를 뛰쳐나가 다급한 손길로 택시를 잡았다.


"대학로로 가주세요!"


그날의 연극 공연은 미스터리 스릴러 추리극으로 매우 재미있었다.


미용실 위층에 살던 부자 노인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면서 미용실에서 일하던 미용사들과 손님들이 용의 선상에 오르는 이야기였는데,


각각의 캐릭터가 뚜렷했고 누가 범인일지 추리하며 진행되는 극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했다.


나의 이목을 가장 끌었던 것은  극 중 미용사 역할을 맡은 한 명의 배우였다.


그녀의 나이는 약 20대 초반으로 보였고 목소리가 카랑카랑했으며, 예쁘장한 얼굴과 날씬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그 할아범을 왜 죽이겠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맛있는 음식에, 선물 공세를 해대는데?


흥, 그야.. 내가 예쁘니까 아니겠어요?”


그래, 그녀는 예뻤다.


젊었고, 아름다웠다.

꼭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더라도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에너지에 난 압도되었다.


즐겁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고개를 숙여 나 자신을 보았다.


난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였고, 매우 지쳐있었고, 피곤했다.


그녀는 젊음을 뽐내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멋지게 하고 있었고, 난 아니었다.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내가 19살의 그때 연극배우의 삶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연극이 너무 하고 싶으면 집을 나오라고,

자기 집에서 재워주겠다고 말했던 선배 언니의 말을 듣고 용기를 냈다면 어땠을까?


인생은 두 번 살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나는 모른다.


그리고 난 여전히 용기가 없으니까 말이다.











<연극배우의 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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