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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래빛 Jun 01. 2021

해준이의 선물

은래빛 에세이


나는 결혼하고 나서 3개월 만에 임신을 했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로 일찍 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계획한 임신은 아니었다.


많이 당황했지만, 난임도 많은 시대에 아이를 갖게 된 것도 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시부모님께서 육아를 도와주겠다고 말씀해주셨다.



아이를 출산하고 100일이 조금 지나자 나는 회사로 복직을 했고, 시부모님은 아이를 데리고 지방으로 내려가셨다.


그렇게 난 아이와 떨어져 지내면서 영상통화를 하거나, 주말에 내려가서만 아이를 돌보았다.


남편과 나는 서로 이렇게 상의했다.

비록 아이와 떨어져 있지만 그동안 같이 열심히 일해서 서울에 빨리 집을 마련하자고.


아파트 단지 안에 초등학교가 있는 집을 마련한 다음, 입학 전에 아이를 데려오자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떨어져 있는 아이가 마음에 걸렸지만, 항상 퇴근이 늦은 우리였기 때문에 같이 살아도 별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곤 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는 기차역으로 달려가 아이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만 하루 반나절 정도 아이와 지내고 나면 다시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아이가 우리를 보며 엉엉 울어도 어쩔 수 없이 문을 닫고 서울로 출발해야 했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힘들지만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열심히 노력한 끝에 결혼한 지 4년째 되던 해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집에 있는 대출금을 갚아나가려면 앞으로도 몇십 년은 부지런히 일해야 했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계획대로 초등학교가 단지 내에 있는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준이는 그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초등학교를 갈 수 없었다.



해준이는 3살이 되던 해에 자폐성 1급 장애로 진단받았다.




혹자는 말한다.

자폐성 장애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거의 선천적으로 타고나기 때문에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니 자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아이를 조부모 손에 맡기지 않고 손수 키웠다면?

그렇지 않더라도 육아휴직이라도 전부 써서 1년만이라도 아이를 돌봤다면?

차라리 종일 아주머니를 쓰더라도 서울에서 같이 살았다면?


아이가 나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할 때 난 그조차도 모르고 업무에 몰두했을 것이다.

아이에게 엄마의 사랑이 필요할 때 나는 동료들과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초등학교가 딸린 집을 장만한다는 목표만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해준이의 진단명을 듣고 아이에게 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숨죽여 울었다.

눈물을 그치고 싶었지만 그쳐지지 않았다.


이 앞이 보이지 않는 큰 불행 앞에서 난 무력했다.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자폐성 장애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각종 기사와 뉴스, 그리고 의학논문, 영유아 발달과정에 대한 이해 등등의 책들을 섭렵했다.


그리고 '반응성 애착장애'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 양육자가 아이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방치한 경우, 일시적으로 자폐성 장애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자폐성 장애가 아니라 '반응성 애착장애'이므로 엄마와 친밀한 애착관계가 형성되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아이와의 애착을 형성하지 못했고, 나를 원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했으니 해준이가 '반응성 애착장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곧바로 육아휴직을 했다.


1년간 최선을 다해 사랑과 관심을 준다면, 해준이가 보통 아이들과 같이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1년간의 시간을 보내고 내가 알게 된 것은,


우리 해준이는 '반응성 애착장애'가 아니라 '자폐성 장애'라는 사실이었다.


                          



"해준아~ 오늘도 수고했네~ 학교 잘 다녀왔어?"


"..."


"자, 손 씻고 밥 먹어야지?"


"휘유휘유휘유~~~~~ 어!! 어!! 우으으~~"


"그래그래 이제 밥 먹자"


"..."


"해준아 손으로 말고 수저로 해야지~ 바르게 앉아서~ 잠깐만!! 엄마가 해줄게.. 잠깐만!!"


"으!! 으아아아아~~ 휘유휘유 뚜뚜뚜"



그는 13살이 되었지만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한다.


지속적으로 언어치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물을 달라고 할 때 "물! 물 해봐~~"라고 여러 번 지시하면

"... 무..."이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아주 가끔 "엄-마" , "함 무니-" 이런 말을 하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처음에는 그런 단어들을 한번 말하면 지속될 것이라 생각하고 크게 기뻐했지만, 그런 단어들 조차 지속되지 않았다.


그저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씩 튀어나오곤 했다.




하루는 해준이와 놀이터에서 놀고 와서 손을 씻기러 화장실로 데려갔다.


세면대 옆 샤워부스에서는 아이 아빠가 샤워를 하고 있었다.


"해준아~ 손 씻자~ 저기 아빠가 샤워하고 있네~"

"..."

"해준아 손 씻자 이리 와~"


해준이는 서서 샤워부스 안에 아빠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해준이가 입을 열었다.

"...아쁘아아- 샤-워-해애애--"


"그래!! 해준아!! 아빠 샤워해!! 샤워하고 있어!!!!!!"


놀란 남편도 샤워부스 문을 벌컥 열고 말했다.

"해준아! 그래 아빠 샤워한다!!"


난 눈물을 흘렸다. 해준이가 스스로 먼저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너무 기뻤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해준이는 그 이후로 2년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제 해준이가 말을 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물론 너무나 기쁘고 아이를 크게 칭찬해주지만,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난 왜 아이에게 엄마라는 말 조차 들을 수 없는 것이냐며,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냐고 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2년에 한 번씩 3년에 한 번씩만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해준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그는 오늘도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


학교의 교생 선생님에게서 아주 멋진 상장을 받아왔다.


그리고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시작하면서 "해준아! 할머니에게 인사해!"라고 말하자,


해준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녀엉-하-세-"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 해준아! 안녕하세요 했어? 너무 잘했어!!!"


난 크게 기뻐하며 아이를 칭찬해주고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쓰다듬고 뽀뽀해주자 해준이가 헤죽거리며 기뻐한다.




해준아,


다음번은 몇 개월 뒤, 몇 년 뒤가 될지 모르지만


네가 주는 선물 기대할게!





해준이가 받아온 멋진 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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