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37살에 찾아온 불안장애 극복기 - 6
엄마가 서울로 올라왔다.
난 종일 불안에 떨면서도 나에게 와달라고, 와줬으면 좋겠다고 엄마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이미 아픈 아빠를 간병하고 계셨고, 장애를 가진 해준이로 인해 심한 마음고생을 겪었다.
더 이상 엄마를 힘들게 할 수 없었다.
그때 나의 지인인 제인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 언니..."
난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괜찮아, 괜찮으니까 뭐든지 말해봐.. 울고 싶으면 울어.."
제인 언니는 내가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가장 먼저 인지하게 해 준 사람이었는데, 서울에 친인척이 없는 나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소중한 지인이었다.
그녀는 내가 혼자서 불안에 떨며 울고 있을 때나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전화를 해왔다.
나는 울먹이면서 어깨의 통증과, 나아지지 않는 불안과, 병원에서 입원을 권유한 사실, 그리고 차마 엄마에게 말할 수 없는 심정을 토로했다.
".. 아냐.. 말해도 돼.. 응응.. 엄마한텐 그래도 되는 거래.. 그게 엄마야..
네가 이렇게 아픈데도 말을 못 했다는 걸 알면.. 엄마가 얼마나 더 아파하시겠니.."
제인 언니의 말에 용기를 내서 난 엄마에게 내가 입원해야 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렸다.
"엄마가 올라가마! 내가 가야 되겠다! 조금만 기다려!"
난 서울이 초행길일 엄마를 위해 기차역으로 마중 나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마중 나갈 수 있는 최선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의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엄마가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우리 집에 도착했다.
그녀는 나를 보고 매우 놀라더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나의 깡마르고 불안한 눈빛을 한 몰골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 엄마...."
".... 그래.. 어서 들어가자.."
나는 처음으로 불안에 떨지 않고 낮잠을 푹 잤다.
오늘은 내가 잠에서 깨도 혼자가 아닐 것이다.
눈을 뜨자 엄마가 만든 맛있는 갈치조림 냄새가 코를 찔렀다.
"... 엄마.."
"응, 일어났냐? 와서 밥 좀 먹어봐라"
난 맛있는 갈치조림에 밥을 한 그릇 반을 뚝딱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내 딸..."
엄마는 나의 궁둥짝을 두들겨 주었다.
엄마와 나는 같이 아파트 산책로를 걸었다. 마트나 시장에 들르기도 했는데 금세 내가 불안을 느끼거나 지치면 엄마가 나를 부축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람이 부는 거실 창가에 앉아서 같이 과일을 깎아먹거나 간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난 그녀에게 내가 회사에서 힘들었던 일, 해준이의 장애를 받아들이기 위해 했던 마음의 노력들을 얘기했고, 연극에 몰입했을 때 느꼈던 그 기쁨과 재미있는 공연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했던 연극 공연을 열정적으로 재연해 보였고, 엄마는 나에게 이런 예술적 재능이 있는 줄 몰랐다며 진심으로 즐거워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엄마와 함께 울고 웃고, 함께 자고, 엄마의 맛있는 집밥을 먹었다.
엄마와 함께한 9일간의 시간은 마치 깊은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힘도 없던 나를, 엄마가 번쩍 들어 올려 꺼내 준 것만 같았다.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9일이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