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 대해 생각하려면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첫 돈벌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얼마 뒤였다. '20대가 되면 성인이니 용돈은 알아서 벌어야지'란 제법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던 터였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남는 건 뻗치는 힘 밖에 없으니 선택이랄 것도 없이 인력 사무소에 가야지 싶었다.
문제는 내가 극단의 'I'(내성적) 성향이었다는 것. 고등학교 축제 때조차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두운 벤치에 홀로 앉아 환하게 밝힌 운동장 무대를, 대한제국 말기 무장봉기를 처음 본 외국인 선교사처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친구를 사귀려면 족히 3년은 걸리는 터라 각 3년씩인 중고등학교 생활에서 절친을 사귀지도 못했다. 학교 적응기를 빼면 수학적으로 계산이 맞지 않는 일이니까. (음?)
그런 내가 무슨 일을 받을지 모르는 인력 사무소를 제 발로 찾아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일을 해야 한다고? 겁이 난다고 해야 할지, 자신이 없달지, 그런 고민으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 성인이니 용기를 내자.'란 결론에 도달했다. 가만히 떡국만 먹어도 '성인'이 된다는 걸 몰랐다. 대부분 그렇게 어른이 되니까. 그런데 그때는 어느 정글 부족처럼 발에 끈을 묶고 맨바닥에 점프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어른이 된다고 오해했었던 것 같다.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새벽 인력사무소를 찾았다. 관리인은 주민증을 받아서 서랍 속에 넣고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가락으로 지명해서 사람을 차에 태웠다. 작은 승용차에 5명이 빽빽이 실려 도심을 지나 어딘가로 달리기 시작했다. 모두 패전 후 이송되는 포로처럼 말이 없었다.
가끔 잠에서 깨 주변을 살필 때마다 녹색 빛이 늘어나고 있었다. '맙소사.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야?' 휴대폰도 없는 시절이었으니 이대로 새우잡이 배에 태워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주책없이 잠은 또 왜 그리 오는지.
엔진이 꺼지고 부스스 사람들이 차에서 내린다. '여긴 어디죠?'라고 묻고 싶었지만 역시 아무도 묻지 않았다. 잠자코 주변을 둘러봤다. 깊은 숲 한가운데 거대한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가 우뚝 서 있었다. 아마도 시멘트 공장 같은 게 아니었을까? 아침인데도 거대한 잿빛 건물을 배경으로 이미 레미콘과 중장비가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우리를 데리고 온 아저씨는 한쪽 귀퉁이로 일꾼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말했다.
"저기 있는 걸, 여기로!"
작업지시는 코딩 언어처럼 단순 명료했다. 일명 바라시(거푸집 해체) 작업으로 떼어낸 거푸집 형틀을 재사용을 위해 한쪽에 옮겨 놓는 작업이다. 벽에는 못이 촘촘히 튀어나와 있고, 양생이 덜 된 쪽 동바리(거푸집 서포트)를 피해야 했다. 판자에도 여기저기 못이 있다. 우리는 로봇청소기처럼 장애물을 피해 판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몇 번인가 못에 찔렸다.)
문제는 이 작업지시가 미친 듯이 반복된다는 점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저기에서 여기로'가 '여기에서 저기로'로 바뀌었다는 정도? 단순 노동에 팔이 후들거리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머리를 비운 채 몸이 내지르는 고통을 묵묵히 감내했다. 그것은 고행하는 수행자와 비슷했다. 순간, 이 정도 강도의 노동으로 저녁까진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그때, '이거 먹고들 해'란 소리가 들렸다. 우리에게 일을 시키던 아저씨가 검은 봉지에서 건넨 건, 딸기 우유와 보름달빵. 아침 대신 주는 새참이었다. 오전 9시 반쯤이었다. 먼지로 뒤덮인 판자 떼기에 앉아 달콤한 간식을 먹었다. 방금 전까진 도저히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휴대폰 급속충전을 한 듯 몸이 금방 회복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몸을 쓰는 일용직 노동자에겐 따로 휴식 시간이란 게 없다. 그러니 경력 있는 일꾼들은 요령껏 쉰다. 깊은 숲이 작업장이라 '야리끼리'(할당량을 끝내면 퇴근하는 일)도 없으니 초보일꾼에게 공식적으로 쉴 수 있는 휴게시간은 오전 새참과 점심 및 낮잠 시간, 오후 새참 등이 전부인 셈.
그런데 이 시간의 배치가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운동 생리학자와 심리학자 논문을 토대로 만든 듯 섬세하게 배치되어 있어서 '한계다!' 싶을 때마다 새참이 나왔다. 더워서 쓰러질 것 같을 때 점심과 낮잠 시간이 주어졌다. 공사장 한편에 가건물로 세워놓은 함바집(건설현장 식당)에서 배추 건더기 몇 개가 들어간 된장국과 김치, 단무지뿐인 점심을 먹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에서, 일하며 안면을 튼 또래가 물었다. '내일도 올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한 달 정도는 사람이 필요하대요. 내일도 와야지.' 점심도 형편없고 산골 작업장인데 또 온다니 내심 놀랐다. '같은 작업장에서 길게 하는 게 편해요.' 또래의 웃음이 어쩐지 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증을 돌려받고 일당을 받고 시내버스에서 내렸다. 마침 정류장 근처를 지나던 어머니를 만났다. '옷 좀 봐.' 그제야 내 옷을 봤다. 검은 셔츠엔 땀이 맺힌 소금기로 가득했다. '사람 몸으로 소금을 만들 수도 있구나!' 처음 깨달았다.
이후, 어머니의 담백한 반응처럼 나 역시 산골의 육체 노동에 대해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하루 육체 노동으로 일의 숭고한 가치라든가 돈 벌기 힘들다던가 따위 교훈을 이야기하는 건 멋쩍은 일이란 걸 알았으니까. 일당으로는 친한 동생들과 피자를 사 먹었다.
하지만 잠자리에 누웠을 때 작은 안도감이 찾아왔다. 내가 설정한 분명한 경계를 기어코 스스로 넘어봤다는 것. 스무 살의 나는 그 정도 프라이드면 충분했다.
대부분의 돈벌이란, 내가 아닌 타인이 설정한 경계를 넘는 일이라는 걸 깨닫기 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