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즈노트 Oct 14. 2024

[파르메니데스] 불변의 논리

하나를 미토스 정령이 데려간 뒤, 깊은 밤 홀로 숲에 남겨진 유진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준 불꽃을 이용해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불꽃의 방향을 좇다 보니 이내 더 깊은 숲길에 접어들고 말았다. 짐승들의 음침한 울음소리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르스름한 달의 그늘 사이로 분명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크르르……으르렁.”


기괴한 목소리를 내며 먹잇감을 찾듯 돌아다니는 것은 흉측한 좀비 무리였다. '미토스의 숲에는 공포에 질려 상상하면 그대로 무서운 존재가 나타나는구나!' 놀란 유진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다. 고개를 돌려 보니 묘지에서 기어 나오던 좀비가 엉덩이에 깔려 버둥대고 있었다.

 

“히이익!”


 

유진이 소리를 지르자, 사진을 찍는 듯 모두가 멈춰 서더니 주변에 있던 좀비들까지 합세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유진은 마지막 용기를 쥐어 짜내 비판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비판의 검을 휘두를 때마다 좀비들은 원 밖으로 나가떨어졌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온 힘을 다해 대적했지만 금세 지치고 말았다. 탈레스의 물 항아리가 떠올랐지만, 잠시라도 방어를 멈췄다간 파도처럼 몰려드는 무리에 파묻힐 것 같았다.

 

‘하나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좀비에게 물리면 부모님 품과 아늑한 내 방에도 영영 돌아가지 못하겠지? 이 차가운 숲 속을 좀비가 된 채 헤매며 살게 될 거야.’ 눈물이 고인다. 순간 힘이 빠져 칼마저 놓쳐 버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밝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빛은 달이 아니었다.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무릎까지 내려온 여신이 커다란 바위 위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무표정한 얼굴이어서 근엄해 보이기까지 했다. 여신은 유진 대신 검을 움켜쥐고는 온 숲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을 지어다!”


검의 중심부에서 뻗어 나온 강력한 빛이 좀비들 몸에 닿자 눈사람 녹듯 흐물거리더니 땅바닥으로 스며들어 버렸다. 애초에 아무 일도 없던 듯 고요한 숲의 밤이 찾아왔다.  


“길을 잃은 어린 철학자여.”


 

여신은 유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신님. 제 친구 하나를 구해야 해요. 레벨 업을 해서 빨리 집에도 돌아가야 하고요. 엄마 아빠도 다시 뵙고 싶어요. 흑흑흑. 그런데 하나는 미토스의 정령들이 데려가고, 숲에선 좀비가 나타나고... 불꽃을 따라가 봤지만 길을 잃고 말았어요.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요? 길을 알려주세요."

 

여신은 근엄한 표정 대신 인자한 미소를 띠는가 싶더니 꼭 안아줬다. 그리고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리의 길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르메니데스의 여신 :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을 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로고스로 세상의 변화 원리를 설명한 분이지요. 불꽃은 그대가 가야 할 길을 밝혀줄 겁니다.  

유진 : 하지만 길을 잃었는걸요.

파르메니데스의 여신 :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나요?

유진 : 아마도... 헤라클레이토스 님은 대립되는 것들의 싸움을 통해서 세상은 소멸, 생성하며 변화한다는 변증법의 원리를 알려 주셨어요. 정. 반. 합에 따르면 '변화'가 '정'에 해당한다면, '반대'되는 건 '불변'이에요. 그리고 이 두 가지 입장을 종합해야 길이 보일 것 같아요. 그러려면 먼저 불변에 대해 알아야 할 듯한데, 여신님께서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파르메니데스의 여신 : 물론이죠. 불변은 나를 찾아온 파르메니데스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깨닫고 들려준 이야기랍니다. 방금 전 내가 외친 주문을 들었나요?

유진 :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요? 주문치고는 솔직히 너무 당연한 말이라, 말장난 같아요.

파르메니데스의 여신 : 하하.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볼까요? 세상이 변화하려면 생겨나는 것이 있고, 사라지는 것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없음'에서 갑자기 뿅 하고 물질이 탄생할 수 있나요? 마찬가지로 있던 것이 갑자기 '없음'이 될 수 있나요? 즉, 있는 것은 계속 있고, 없는 것은 계속 없어요. 따라서 세상이 변화한다는 건 환상이에요.  

유진 :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니, 없는 데서 있는 게 나오는 건 어려워 보이네요. 하지만 테이블에 '빈 공간이 있고', 그쪽으로 옮기면 꽃이 있는 게 되잖아요? 운동과 변화가 일어난 것이고요.

파르메니데스의 여신 : 방금 '빈 공간이 있다.'라고 했는데, '빈 공간'은 '없음'이란 뜻이에요. '없음이 있다.'가 돼버리죠. 마찬가지로 우리는, '빈 공간이 있다, 無(없음)로 가득 찼다.'처럼 '없음'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말해요. 그것은 언어에 의한 착각일 뿐이랍니다. '없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생각하거나 말할 수 없어요. 따라서 있는 것은 영원히 있는 것이지 없음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답니다.  
 
유진 : 와.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신기한 논리네요. 이 말이 어려운 이유는 언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세상엔 계절의 변화나 공이 굴러가는 것 같은 운동이 분명 눈에 보이기 때문 같아요.

파르메니데서의 여신 : 맞아요. 그래서 이성을 중시한 철학자들은 감각으로 느끼는 경험보다는 순수한 논리로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지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 둘 다 이성을 활용했음에도 변화와 불변이란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 것도 신기하죠?

여신은 검을 돌려주며 말했다.


“영웅이 될 어린 철학자여, 길을 잃었다고 슬퍼하지 마세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유진이 대답했다.

 

“여신님, 하지만 저는 평범한 학생일 뿐이에요. 방금 여신님 말씀도 솔직히 이해가 안 가고요. 저는 공부를

싫어하고 게임만 좋아하는 아이일 뿐인데 하나는 그런 나를 믿고……. 흑흑.”


여신이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숲이 금세 대낮처럼 환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끔 길을 잃는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힘을 내서 걷는 길은 언제나 옳은 길입니다. 지금까지 잘해왔어요. 계속 걸어 나가세요.”


여신은 품에서 지도를 한 장 꺼내 건넸다.


“이것은 생각의 지도입니다. 방향을 잃었을 때 목적지를 알려주는 아이템이지요. 이 지도가 하나를 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면 누구에게 가야 할지를 알려줄 겁니다.”


유진은 여신의 가르침에 따라 지도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외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홀로그램처럼 투명한 ‘생각의 지도’가 떠올랐다.




파르메니데스의 가르침
: 이성으로 논리적 답을 찾자

학습키워드
: 불변 / 일자 / 논리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 그런 스승에게 비판을 가한 아낙시만드로스, 비판을 거듭하는 불꽃같은 싸움에서 변증법 원리를 밝힌 헤라클레이토스를 보면 미토스적 믿음에 대적하여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이성이 점차 날카롭게 발전해 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이성을 활용한 논리의 끝판왕으로 등장하는 철학자가 바로 파르메니데스입니다.


이성을 똑같이 활용했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의 원리에 관심을 가진데 반해, 파르메니데스는 존재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으로 상반된 결론을 끌어냅니다. 둘의 차이는 원리냐 존재냐의 싸움 같기도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란 말은 맞는 듯합니다. 없는 데서 있는 것이 나올 리도 없고(생성), 있는 것이 사라질 리도(소멸) 없습니다. 게다가 생각이란 그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대상 없이 생각한다는 것도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무(無)로 가득 차 있다.'처럼, 없는 걸 마치 있는 것처럼 표현한 언어로 인해 생겨난 환상 같기도 합니다.


따라서 파르메니데스는 조금의 공간도 있을 수 없는 세계는 당구공처럼 가득 찬 구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통일성을 가진 유일한 구체를 일자(一者)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세상엔 분명 계절도 변하고 공을 던지면 운동도 일어나는 듯합니다. 도리어 말장난은 파르메니데스가 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논리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사고 실험을 해봅시다. 우리는 애니메이션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애니메이션 세상에선 나비도 날고, 계절도 변합니다. 우리는 영화 속 세계가 진짜고, 운동과 변화도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애니메이션의 원리는 개별적인 그림을 순서대로 이어 붙여 넘기는 '플립북'과 같습니다. 나비가 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완벽하게 고정된 한 장의 그림인, 일자(一者)가 있을 뿐입니다. 그저 순서대로 촤르르 넘어가면서 운동이 있는 것 같은 착시가 보일 뿐이지요.  


우리가 영화나 게임 속에 살더라도 논리의 힘으로 세계의 정체를 파악할 있다니... 논리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논리추후에 원자론과 다원론은 물론 존재론, 논리학, 언어학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끼칩니다.


결국 논리가 만들어내는 이상한 결론들은 당연한 것을 결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선 안됨을 깨닫게 합니다. 또 논리를 앞세워 과감한 주장도 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내가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무지의 지)뿐 이기에, 언뜻 이상해 보이는 상대의 논리도 잘 들여다봐야 한다는 겸손함도 깨우치게 합니다.  



파르메니데스(기원전 약 515년~기원전 약 460/445년)는 고대 그리스 엘레아(지금의 이탈리아 남부 지역) 학파의 철학자입니다. 논리를 이용해 세계를 탐구하였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변화의 원리를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와 대립하는 듯 보입니다. 그가 남긴 1) 서사시에 등장하는 여신은 “세상은 진짜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불변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엄격한 논리로 생각해 보면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올 수 없고,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성으로 본 물질세계는 2) 영원불멸하다는 논리적 결론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양초에 불을 붙이면 녹아 없어지므로 있던 것이 없는 것으로 변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양초가 다른 에너지로 모습만 바뀌었을 뿐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논리는 평소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새로운 관점을 일깨우고 더 나은 생각으로 뻗어 나가도록 돕습니다.


1 서사시 : 주로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의 일대기를 써낸 이야기.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여 최초의 논리학자로 평가받는 파르메니데스도 자신의 주장을 여신을 등장시켜 이야기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쉽게 설득하기 위한 목적이라 볼 수도 있지만, 미토스와 로고스적 관점이 뒤섞여 있었던 시대상이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2 영원불멸 :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 물질로 가득한 세계가 영원하다는 생각은 이상하지만 질량보존법칙, 에너지보존법칙 등의 사례처럼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인정될 수 있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전 10화 [헤라클레이토스] 학문 발전의 원리 : 변증법 활용논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