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거부하듯 말이다.
“사랑 많이 받고 자라신 티가 나요.” 지인은 물론, 처음 본 사람들에게도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어릴 때부터 이 소리가 그렇게 기분이 좋았다. 아직도 부모님은 날 “애기야”라고 부른다. 밖에서는 나름 어른인 척하고 사는데, 부모님 눈에는 아직도 아기 같단다. 친척들은 모일 때마다 “그렇게 딸을 예뻐해서 어떻게 결혼시킬래”라며 눈을 흘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아빠는 울 거야!”라고 했고, 엄마는 “평생 데리고 있을 수는 없으니 때 되면 보내야지” 말하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처음으로 남자친구의 존재 여부를 공개하자마자 엄마는 온몸으로 이 사실을 거부하듯 몸살에 걸렸다. 어느 주말에는 자취방에서 혼자 주말 늦은 오후를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카톡이 왔다. “너 OO이랑 여행 갔니? 오피스텔 비밀번호 당장 말해.” 독립한 지 4년 만에 처음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있다가는 엄마의 상상력이 도를 지나칠 것 같아 바로 본가로 향했다. 엄마도 미안했는지 “딸 혹시 놀랐어?”라며 나를 맞이했다. 화도 났지만, 30년 만에 남자친구가 있는 딸을 처음 보는 엄마의 마음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친구들은 20살 때 겪어야 할 일을 30살 때 겪는 거라 했다. “그러게 왜 여태까지 모솔인 척했냐”는 핀잔도 들었다. “말하면 이렇게 될 게 뻔한데 어떻게 얘기했겠냐” 했지만 20살 때 겪는 게 더 나을 뻔했다고 수십 번도 더 생각했다.
늘 보던 엄마가 아니었다. 잠을 며칠간 못 잤는지 수척해져 있었다. 혼자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단다. 엄마가 궁금한 건 무엇이며, 걱정하는 건 무엇인지 다 얘기해 보라고 했다. 엄마는 “그냥 아직 때가 아닌 것 같다”라는 결론으로 귀결됐다. 딸이 금방이라도 떠나버릴까 봐 두려운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네가 예쁘게 연애한다니 좋기도 하다”라고도 했다. 엄마 마음도 오락가락해 보였다.
이날은 이렇게 일단락됐지만, 나의 베스트 프렌드였던 엄마와의 관계는 예전처럼 돌아가지지 않았다. 주말에 집에 가거나 같이 여행을 가서 재밌게 얘기하다가도 늘 서운해 보이는 엄마의 표정과 말투에 마음 불편하게 돌아오곤 했다. 일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어딘가 체한 것 같은 마음을 안고 살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을까. 부모님과 근교로 놀러 나갔다가 돌아오던 차 안에서 일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