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이 와중에도 내 반찬을 걱정했다.
집에 와서 아빠랑 둘이 엄마에게 번갈아 가며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역시 받지를 않았다. 아빠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엄마가 갱년기라고 해도 저건 너무 심하다"라고 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부모님이 괜히 싸우게 된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아빠, 오늘 나 때문에 엄마 그러는 거야. 나 들으라고." 내가 말했다. 아빠는 "예상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엄마 마음은 아빠도 이해해"라고 덧붙였다. 엄마는 지금으로부터 약 34년 전, 꽃다운 나이 28살에 우리 아빠와 결혼해 직장도 그만두고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부산에서 올라와 서울에 있는 친구라곤 대학 친구들 밖에 없었다. 시집살이하랴, 내조하랴, 아이 키우랴. 엄마에게는 그 친구들마저 만날 시간이라곤 없었을 거다. 그렇게 엄마는 세상을 잃고 가족을 얻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엄마의 예쁜 딸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학원 끝나면 엄마랑 동네 산책하다가 트럭에서 파는 김말이와 떡볶이를 먹었다. 아, 뻥튀기 아이스크림집도 단골이었다. "찌찌뽕~" 엄마랑 나 둘만의 언어도 많았다. 엄마랑 이야기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빠가 속을 썩이면 엄마는 어린 나한테 털어놨다. 엄마와의 친밀함 덕분일까, 나는 사춘기가 없었다.
그러던 나의 "남자친구가 너무 좋다"는 발언은 엄마한테는 단순히 "딸이 연애한다!"가 아니었을 테다. 금방이라도 내가 엄마를 떠나버릴 거라는 이별 선언으로 들렸을 거다. 엄마의 인생이 떠나가는 기분이었을까. 아빠랑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잠시 도망치고 싶었다. 이번주는 이만 자취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엄마가 주말에 오면 갖고 가라고 담가놓은 깻잎은 애써 외면했다.
복잡한 감정을 안고 택시를 탔다. 한번 더 엄마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걱정됐지만, 애써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냥 그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에게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카톡이 왔다. "깻잎반찬 못 싸줬네. 다음에 집에 오면 그때 갖고 가. 밥 잘 챙겨 먹고. 건강 조심해."
이 와중에 내 반찬, 내 건강 걱정이라니. 애써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