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질문을 30살 딸이 듣는 게 맞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너 그러다가.. 사고.. 하..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해. 그니까 엄마 말은 너 임신이라도 할까 봐 겁나." 엄마가 어렵사리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다. 내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들은 가장 어이없는 말이었다. 성에 대해 전혀 모르는 20살도 아니고, 30살한테 이런 걱정이라니. 처음에는 걱정 어린 '농담'인 줄 알았다.
이건 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피임에 대해서 빠삭하게 잘 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남자친구를 대동해서 '무슨 일이 생기든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외치게 시켜야 하는 건지. 아니 이런 질문을 내가 지금 듣는 게 맞는 건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할 때쯤, 엄마는 "아빠랑도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 거야."라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몸살에 걸리면서까지 내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때, 문득 "반항심에 얘네가 사고라도 치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들었다는 거다.
딸 가진 부모는 이런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나 뭐라나. (참고로 나는 '여자가 조심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우리나라 성교육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거라며 엄마 말에 종종 반박하곤 했었다. 조심은 서로 해야지!) 수치스럽기도 어이없기도 했지만 부모님도 딸의 연애를 처음 겪으시니 또 이해해보려고 했다. "아이가 생긴다는 건 나한테 정말 무서운 일이야 엄마.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쌓아놓은 커리어가 멈추거나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거니와 아이를 낳았을 때 내가 그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의문이거든." 내가 요즘 갖고 있는 생각을 한참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그런 불안함이 들 때면 엄마 딸이 쌓아놓은 커리어를 생각해 줘. 내가 이걸 지금 포기하겠어?"라며 마무리했다. 내가 누구보다 일 욕심이 많은 걸 엄마는 잘 아니까 말이다. 엄마는 이내 민망했는지, 순순히 "알겠어"라며 이 '임신 사태'는 바로 종결됐다.
우리 부모님 세대(60년대 초반생) 다른 부모님들은 어떤 식으로 자녀와 성에 관해 소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집안에서 금기시하는 주제가 있으면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분출된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면 툭 터 놓고 이야기할 거라 생각한 건 나의 착각이었다. 엄마도 이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운을 띄운 뒤에도 꽤나 긴 공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한테 얼마 전에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야 난 그런 얘기 20살 때쯤 들은 것 같은데 너무 늦은 담론 아니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모님이 걱정하는 게 싫고 간섭받기 싫어서 굳이 말하지 않았던 주제가 이렇게 결국 더 큰 돌멩이가 되어 돌아올 줄이야. 갈등에도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걸 깨닫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