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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련강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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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Nov 16. 2022

모노드라마

[산문]백련강 - No. 9

    아버지. 제가 왔어요. 아버지 아들이요. 오랜만에 병실까지 찾아왔는데 여전히 잠만 주무시고 계시네요.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도 잠이 많으셨어요. 주말이면 놀아주시겠지, 하고 생각해도 막상 주말이 되면 항상 주무시기만 하셨죠.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해요. 병원 특유의 냄새 있잖아요. 시큼한 소독약 같으면서도 가습기랑 난방기의 공기가 뒤엉켜 나는 쿰쿰한 냄새 말이에요. 아버지는 이런 냄새에도 잘도 주무시네요. 아버지 보러 왔다가 병원 밥을 먹었는데 정말 최악이에요. 아버지가 링거로 영양분을 주입받는 게 아니었다면 벌써 불같이 화를 내셨을걸요? 아니다. 분명 아버지라면 링거로 누런 영양제가 들어가는 걸 보고만 있어도 화가 치민다고 하실 거예요. 입안 가득 넣고 씹는 음식의 맛이 아니니까요.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왔는지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네요. 왜 이제야 왔냐고 섭섭해하지 마세요. 제가 드디어 붙었어요! 기획사예요. 이거 보세요. 새하얀 바탕에 제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는 게 보이시죠? 제 프로필을 볼 수 있게 만든 명함이에요. 이게 QR 코드라는 건데, 휴대폰으로 찍기만 하면 제 홈페이지가 나와요. 아직은 출연한 작품이 없지만 곧 가득 채워질 거예요. 드디어 이뤘어요. 너무 오래 걸렸죠. 아버지는 젊었을 때 배우가 꿈이셨다면서요. 겅성드뭇한 머리만 아니면 지금도 배우쯤은 거뜬하다면서 자신감 넘치게 말씀하셨잖아요. 이것도 보실래요? 제가 다닌 오디션을 기록한 일지예요. 백 번도 넘게 떨어졌어요. 저 정말 멍청하지 않아요? 노트가 꽉 차서 넘칠 때까지 떨어지기만 했어요. 연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아버지는 어떻게 그걸 했을지 상상도 안 가요. 준비하다가 진작에 포기하셨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가 갔죠. 해보니깐 진짜 하기 싫더라고요. 성과도 안 나오고 느는 것 같지도 않은 제가 너무 멍청하게 보였거든요. 사실 제가 이번 오디션에 붙은 거, 전부 아버지 덕분이에요. 왜냐고는 묻지 마세요. 그걸 말하려고 들렸으니깐요. 사실 저는 아버지가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을 거는데도 눈꺼풀조차 안 움직이잖아요. 식물인간이 돼도 소리는 다 듣는다면서요? 제가 하는 쓸데없는 말 전부 잊으셔도 이 말은 꼭 기억해 주세요. 제가 이번에 오디션장에서 받은 역할이 죽어가는 젊은 시한부였어요. 참 난해한 주제였어요. 당시 현장도 아수라장이었고요. 단순히 죽어가는데 왜 어렵냐고요? 단순하니까요. 너무 단순해서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연기잖아요. 거기서 눈에 띄는 건 정말 하늘에 별 따기라니까요. 그런데 저는 머릿속에 스치는 장면이 있었어요. 시큼한 소독약 냄새. 쿰쿰한 병실 냄새. 하루 종일 응급환자가 오가는 소란스러운 병원. 그 속에서 항상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산소 호흡기에 옅게 퍼지는 희뿌연 김. 그걸 잘 들여다보면 아버지가 간간이 호흡을 하는 게 느껴졌어요. 미약한 소리지만 거친 숨소리가 들렸죠. 저는 아버지를 최대한 따라 했어요. 목구멍을 긁고 올라오는 듯한 탁한 숨소리.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옅게 퍼져 나오는 희뿌연 입김. 저는 몹쓸 자식이에요. 아버지가 이렇게 죽어가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누워 있는데. 정작 죽어가는 시한부라니까 아버지밖에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렇게 오디션에 합격했는데 너무 기뻤어요. 기뻐서. 분명 너무 기뻤는데, 아버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요. 사실 아버지라면 다 이해하실 거 같았어요. 누구보다 제가 붙은 걸 좋아하실 거 같았어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홈페이지만 나와도 제 홈페이지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실 것 같았고, 김 씨 아저씨랑 오 씨 아저씨, 옆집 할매한테까지 제 명함을 뿌리실 모습이 훤했어요. 사실 아까도 병실 앞에서 바로 들어오지 못했어요.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데, 구역질이 나더라고요. 저는 바로 화장실로 뛰어갔어요. 차가운 변기를 붙잡고 울부짖는 듯한 소리를 토해내며 속을 게워냈어요. 제 몸에서 시궁창 같은 냄새가 풍기는 것 같았어요. 병원의 찝찝한 냄새와는 차원이 달라요. 아버지가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는 게 다행이에요. 제 냄새가 맡아지지 않을 테니까요. 저는 연기를 하면서 평생 몸에서 나는 냄새를 견뎌야 할지도 몰라요. 나는요. 제가요. 아버지가 눈을 뜨고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염치없는 걸까요. 아이 참, 또 눈물 흘리시네. 뺨 위로 미끄러지는 눈물 좀 보세요. 아버지는 생전 눈물 한 번 없던 사람이었잖아요. 사람은 깊은 잠에 들면 전부 어린아이가 되나 봐요. 이렇게 눈물만 흘리고 아무것도 못 하잖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다음에는 꼭. 후레자식이라고 욕하면서 원망해 주세요. 아비를 팔아서 좋았냐고 물어주세요. 다음에는 꼭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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