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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련강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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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Apr 06. 2023

마지막 여름

[산문] 백련강 - No. 8

    나무를 깎아내는 예리한 칼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마냥 두껍게만 보이던 나무토막이 허물처럼 벗겨지고 희끗한 속살을 드러냈다. 나는 오직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나무를 깎았다. 아현. 여자친구인 아현의 웃는 얼굴을 뇌리에 새기며 손을 움직였다. 목각 인형을 만드는 건 생명을 불어넣는 것과도 같았다. 조각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얼굴만 떠올랐다.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나무를 깎아냈다. 오똑하게 생긴 코를 생각하며 나무의 형태를 갖춰줬다. 텁텁한 나무 향을 뒤집어쓴 채로 목각 인형을 만들어도 군소리 없이 힘이 돼준 아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조각칼을 쥔 손에, 미래를 약속한 아현에 대한 애정이 담겼다. 그때 작업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양손에 시커먼 봉투를 쥔 아현이 작업실로 들어왔다.


    이제 다 버려버리자.

    

    여자친구인 아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현이 양손 가득 들고 온 봉투를 내려놨다. 봉투에 터질 듯이 쌓여 있던 내용물들이 책상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다양한 형태의 목각 인형들이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조각칼을 내려놓았다. 아현은 미간을 구긴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책상 위에 세워져 있는 작은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채 웃고 있는 아현. 화려한 드레스라도 입혀주고 싶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나중에 식이라도 꼭 올리자고 말한 지도 삼 년이 흘렀다. 나는 책상을 가득 메운 목각 인형 위에 손을 얹었다. 거칠고 버석한 겉면의 촉감이 손끝을 타고 퍼졌다.


    손님도 없는데 언제까지 나무만 붙잡고 있을 거야. 이제 더는 못 보겠어.


    아현의 말이 묵직하게 들려왔다. 가게 곳곳에 부유하던 톱밥들이 폐부 깊숙한 곳을 찔러 대는 것 같았다. 작은 인형 공방에 찾아오는 손님은, 기껏해야 일주일에 서너 명이 전부였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실리콘 인형이 거친 목각 인형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다. 기껏해야 전부 같은 모양을 한 인형을 기계가 찍어낼 뿐인데, 정성이 담긴 목각 인형보다 높은 취급을 받는다는 게 안타까웠다. 아현의 직장 월급을 보태어 월세를 돌려 막는 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게 남은 건 책상에 쌓인 목각 인형들 뿐이었다. 나는 목각 인형 하나를 집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채 툭 튀어나온 턱 부분이 보였다. 나는 인형을 사포에 가져다 댔다. 송곳니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조금씩 갈려 나갔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한여름의 열기가 불어왔다. 진득한 담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진열장에 걸어둔 작품들을 하나씩 꺼냈다. 꼼꼼하게 니스를 발라 완성시킨 인형들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인형. 손을 잡고 있는 한 쌍의  인형. 전부 손때가 짙게 묻은 작품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차린 인형 공방이 자리를 잡아갈 때쯤부터 만들던 인형들이었다. 목각 인형들은 만든 사람의 인상적인 순간을 머금고 있었다. 만들 때의 감각. 모양을 구성하며 떠올리는 한 사람. 시간이 지나도 형태를 유지하는 목각 인형은 내게 기억 저장소와도 같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목각 인형들을 시커먼 봉투 속으로 쑤셔 넣었다. 봉투 안에서 달그락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몸의 일부를 떼어낸 것 같았다. 나는 조각할 때 느껴지는 사각임이 좋았다. 예리한 칼끝에서 허물을 벗기듯 얇게 떨어져 나가는 나무토막.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형태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나니 실소가 삐져나왔다. 나는 텅 빈 진열장 문을 닫았다. 오늘로 진열장이 역할을 다했다. 아현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인형 공방을 접고 다른 일을 찾는 게 맞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날수록 손님은 점점 줄어갔다. 나는 몇 번이고 당연한 일이라며 되뇌었다. 봉투 안에 수북이 쌓인 목각 인형들이 자꾸만 눈에 걸렸다.




    목각 인형으로 꽉 찬 봉투를 책상에 올려놨다. 아현은 망설임 없이 봉투를 들어 올렸다.


    저거도 그만 치우자.


    아현은 선반을 가리켰다. 선반에는 그동안 써온 조각칼이 놓여 있었다. 가게를 처음 차릴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조각칼이었다. 아현은 선반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조각칼을 덥석 집었다. 나는 아현이 쥔 조각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현이 조각칼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안간힘을 썼다. 나는 조각칼을 잡은 채 팔을 몸 안쪽으로 세게 당겼다.


    네가 이거로 뭘 할 수 있는데.


    아현이 나를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나는 손에 힘을 풀었다. 온몸이 텁텁한 목재 향으로 물들 것 같았다. 지금 정리하지 않으면 평생 조각칼을 붙잡고 있을 것만 같았다. 작업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아현의 고조된 숨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나는 몸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주홍빛 노을이 산등성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진득하던 열기도 한층 가신 느낌이었다. 




    이제 가게에 남은 목각 인형은 없었다. 목각 인형이 든 봉투를 모조리 내다 버리고는 부동산에 연락까지 마친 참이었다. 나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목재 한 토막이 눈에 들어왔다. 다가오는 아현의 생일에 줄 목각 인형을 만들 목재였다. 나는 미련 없이 목재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이대로 목재를 만지작거리면 다시 버렸던 마음도 되살아날 것 같았다. 휴지통에 버려진 목재 한 토막. 이십 대를 함께 해온 것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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