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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련강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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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May 21. 2023

초연

[산문] 백련강 - No. 10

    뺨을 스치는 서늘한 밤공기. 어둠으로 물든 산속에서 한 쌍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놈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에서 싸늘한 감각이 감돌았다. 놈은 일주일째 마을에 있는 온갖 농작물을 쑥대밭으로 만든 멧돼지였다. 대낮에도 몸을 숨기지 않고 밭을 헤집는다며 마을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할배 없이 엽총을 들고 서 있는 건 처음이었다. 할배는 마을에서 제일가는 엽사였다. 할배가 다리만 멀쩡했으면, 놈을 겨누고 있는 건 할배였을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놈과의 간격을 좁혀갔다. 어둠을 머금은 듯한 칠흑색 털. 집채만 한 크기의 육중한 몸뚱이. 놈은 거친 숨결을 뱉어댔다. 엽사는 절대로 사냥감 앞에서 시선을 돌리면 안 된다. 어떤 순간이 와도 침착하게 사냥감의 급소를 노려보고 놓치지  마라. 순간, 할배가 했던 말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나는 다시 엽총을 꽉 쥐었다. 놈이 나를 향해 힘껏 내달렸다. 가늠쇠가 놈의 미간에 맞닿기 직전, 나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놈이 허물어졌다. 할배에게 배운 기술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매캐한 초현 향이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첫 사냥을 누구보다 축하해 줄 것 같은 할배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심장이 방망이질이라도 한 것처럼 거칠게 뛰었다. 




    할배! 내가 잡았어!


    나는 빠르게 산을 내려왔다. 평소 같으면 현관 앞에 서 있어야 할 할배가 보이지 않았다.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벗으려는데, 유독 왼쪽 밑창만 다 닳은 할배의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몇 달 전, 중풍 진단을 받은 이후, 할배의 왼쪽 밑창은 늘 해져 있었다. 할배의 슬리퍼 옆에 못 보던 신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감색 등산화였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주방 쪽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말소리를 따라 주방으로 움직였다. 식탁에 앉아 있는 할배. 할배 앞에 마주 앉아 있는 낯익은 사람. 희끗한 더벅머리. 겅성드뭇한 턱수염. 거울을 본 것처럼 나와 똑 닮은 이목구비. 아버지였다. 3년 만에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나는 몸을 멈칫했다. 


    시간이 몇 신데, 이제야 와.


    아버지가 손끝에 묻은 김치 양념을 쪽쪽 빨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버지 옆자리에는 큼직한 짐가방이 놓여 있었다. 나는 짐가방을 흘겨보고는 할배 옆에 앉았다. 

    아버지는 나와 할배가 안중에도 없는지 게걸스럽게 밥을 퍼먹었다. 아버지의 모습에 보는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번에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할배한테서 받아간 돈을 다 탕진하고 온 것 같았다. 나는 아버지의 가볍기만 한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낳았다고 다 자식인가. 


    나는 아버지가 더는 보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할배의 말소리가 들렸다. 


    너도 인자, 네 애비 따라 올라가라. 


    할배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할배의 입가에서 옅은 술 냄새가 풍겼다.


    내가 왜. 나는 할배랑 여기서 살 거야. 


    나는 식탁을 거세게 끌며 말했다. 문득, 할배의 왼쪽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다리가 늘어져 있었다. 


    지금 내 하나도 건사하기가 힘든디, 너까지 얹혀서는 귀찮아 죽겄으니까 애비 따라서 가!


    할배가 언성을 높이면서 말을 뱉었다. 나는 할배를 노려봤다. 늘 표적을 노릴 때처럼 날카롭던 할배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창문 틈을 비집고 아슬하게 삐져나온 달빛이 거실을 누렇게 물들였다. 거실에는 아버지가 마신 막걸리 병이 나뒹굴었다. 


    할배.


    할배를 불러봐도 문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배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할배 앞에 놓인 자그마한 탁상에 양이 반쯤 줄은 소주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어여 자.


    할배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할배 앞에 쪼그려 앉아,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할배의 탄탄하던 허벅지는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할배. 나 안 가. 


    나는 읊조리며 할배의 발을 주물렀다. 평생에 걸쳐 산을 오르며 엽사 일을 한 탓에 발이 울퉁불퉁하게 변해 있었다. 할배가 애써 내 손을 피해 몸을 틀어버리고는 소주를 잔에 채웠다. 할배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할배의 입가에서 퀴퀴한 향이 훅, 풍겼다. 방아쇠를 당기고 난 후에 감도는 초연 향. 열기를 잃어버린 차디찬 총구에서 새어 나오는 향이 할배의 숨결과 닮아 있었다. 할배가 소주잔을 내려놓은 채 나를 바라봤다. 나를 말없이 바라보는 할배의 까만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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