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백련강 06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정 Nov 18. 2022

레디, 액션

[산문]백련강 - No. 6

    뭉개진 구름이 잿빛을 머금은 채 하늘에 떠다녔다. 스치듯 불어온 바람에 비릿한 물 냄새가 실려 있었다. 촬영팀은 각자 포지션을 지키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만약의 상태를 대비해 비를 피하기 위한 파라솔도 감독의 자리에만 배치되어 있었다. 비가 온다면 비를 맞지 않는 건 감독과 카메라뿐이었다. 솔직히 나 아니었으면 너 같은 거 써주는 곳도 없잖아. 잘 좀 해봐. 그 자리에 목숨 거는 애들도 많아. 감독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촬영장은 피곤함에 짓눌린 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촬영을 앞두고 예민해진 눈초리. 철근이나 나르던 막노동 현장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 내가 맡은 역할은 회사원 3이었다.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잘린 남자가, 자신의 차 안에서 식은 삼각김밥을 우악스럽게 먹는 역할로 등장했다. 나는 이번 역할을 위해 그동안 먹었던 삼각김밥들을 떠올렸다. 이제 삼각김밥이라면 신물이 나올 정도였지만, 나는 오늘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삼각김밥을 아그작 베어 무는 소리가 귓가에 여전히 맴돌았다.


    먹구름이 점점 짙어졌다. 주연 배우들을 제외한 엑스트라들이 이제야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곧 나의 차례였다. 나는 삼각김밥이 든 봉투를 든 채 차에 올라탔다. 퀴퀴한 냄새가 콧속을 쑤시고 들어왔다. 소품팀 차량이라고 그랬는데, 차에서 연초를 얼마나 피워댄 건지 재떨이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나는 재떨이를 뒷좌석으로 던져두고 정면을 바라봤다. 각도가 다르게 설치된 세 대의 카메라와 모니터를 보고 있는 감독이 눈에 들어왔다. 막상 촬영이 시작되려니 긴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작은아버지였다. 나는 스탭들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며칠 전, 작은아버지가 자신의 부품 공장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불쑥 꺼냈다. 작은 나사나 이음새에 필요한 부품을 검수하는 자리였다. 멀쩡한 것들은 레일 위에 지나가고 모나고 찌그러진 것들은 내 손에 걸러진 채로 다시 재가공될 것이었다. 나는 속이 답답해 가슴을 툭툭 쳤다. 가슴에서 오늘 아침에 먹은 삼각김밥 냄새가 올라왔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검수가 필요한 것은 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날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태로운 의문을 품은 채 등받이에 몸을 늘어트렸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슬레이트를 든 스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를 꺼버렸다. 곧이어 슬레이트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촬영의 시작을 알렸다. 나는 봉투에서 삼각김밥을 꺼냈다. 그리곤 목에 매여 있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울분을 토해내듯 차 핸들을 마구 내리쳤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직장인의 심정은 어떤 기분일까. 지금의 나의 기분과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코가 찡해졌다. 나는 차갑게 식은 삼각김밥 포장지를 붙잡았다. 삼각김밥 포장이 잘 뜯기지 않았다. 포장을 아무리 잡아당겨봐도 벗겨지지 않았다. 컷. NG! 감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들고 있던 삼각김밥을 내려놨다. 야! 우악스럽게 처먹는 장면이라고, 그거 하나를 못 뜯어? 그딴 식으로 할래? 감독이 대본 뭉치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삼각김밥이 뜯어지지 않은 건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이 한 마디가 입 안에 걸린 채 나오지 않았다.

    촬영이 다시 시작됐다. 벌써 먹은 삼각김밥의 개수가 열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속이 더부룩했다. 입가에 삼각김밥을 밀어 넣을 때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감독에게 내 상태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영화를 완성시키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나는 감독의 사인에 맞춰 삼각김밥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매콤한 고추 향이 코끝을 찔러댔다. 차창으로 빗방울이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가 굵직하게 변해 내리기 시작했다. 컷! 야! 오늘까지 대여한 장비 반납해야 하니깐, 똑바로 좀 해봐! 고작 7초짜리 장면이야. 7초! 벌써 몇 번째야! 감독이 내게 소리쳤다. 나는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삼각김밥을 종이컵에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또다시 삼각김밥을 뜯었다. 눈자위가 시큰거렸다. 구역질을 참으며 억지로 입에 삼각김밥을 구겨 넣었다. 레디, 액션!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굵직한 빗방울이 세차게 바닥을 때렸다. 나는 촬영장에 남아도는 빈 박스로 머리를 감싸고 거리를 걸었다. 축축하게 젖은 박스의 군내가 흘러내려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화면에 묻은 빗방울을 문지르며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작은아버지한테서 도착한 문자들 위로, 며칠 뒤에 잡힌 오디션 일정에 대한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씨발.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때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어둔 대본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대본을 주웠다. 잔뜩 구겨진 대본이 축축하게 젖어, 물을 뚝뚝 흘렸다. 우그러든 대본이 인상을 확 구긴 감독의 얼굴 같았다. 물에 젖은 대본에 빼곡히 적혀 있는 글자들이 보였다. 겨우 두 줄인 내 대사에 꼼꼼하게 칠해둔 형광펜 자국.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감정을 잡고 연기를 할지 고민하며 써 내린 수십 가지의 플랜. 촬영장에 올 때까지 준비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는 흥건히 젖은 대본을 그대로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전 05화 매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