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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련강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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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Mar 29. 2023

매화

[산문] 백련강 - No. 5

    누나한테서 문자가 왔다. 3년 만에 온 연락이었다. 누나의 번호는 본 적 없는 생소한 번호로 변해 있었다. 꽃집을 개업했으니 찾아오라는 짧막한 문자였다. 나는 휴대폰을 꽉 쥔 채로 급하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3년 전, 누나가 집을 나가던 날이 아직도 생생히 내 머릿속을 떠다녔다. 부모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누나. 탁상에 올려져 있던 임신테스트기와 산모 수첩. 이미 상황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상태였다. 그때 누나는 고작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였다. 누나의 남자친구는 연락이 끊긴 채 닿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임신테스트기. 어머니의 손에 찢겨 나가는 산모 수첩. 누나의 한 손에는 큼직한 짐가방이 들려 있었다. 누나는 집을 나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 손을 꽉 붙잡았다. 담담한 척하는 누나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나의 또렷한 눈동자가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누나는 집을 나간 이후로 연락을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 그동안 일방적으로 내게 걱정 말라는 문자만 간간이 왔었다. 나는 누나가 하루빨리 집에 돌아오기를 원했다. 




    매화. 누나가 개업한 꽃집의 이름이었다. 나는 피아노 건반처럼 수놓인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계단 꼭대기에 다다르자 널찍한 지하철 역사 안이 환하게 보였다. 퇴근 시간에 겹쳐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역사 안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누나의 가게를 찾기 위해 역사 안을 두리번거렸다. 맞은편에 있는 내려가는 계단. 그곳 옆에 자리하고 있는 화사한 가게. 오고 가는 인파 속에 어울리는 풍경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누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누나가 있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작은 가게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생화들. 가게 앞을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꽃바구니들. 누나는 꽃장식에 완전히 집중했는지 내가 온 지도 모른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3년 만에 본 누나는 많이 야위어 있었다. 생기 넘치고 불그스름하던 뺨은 홀죽하게 들어가 있었고, 윤기 나던 머리칼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푸석하게 변해 있었다. 변한 누나의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문득, 가게 안쪽에 있는 유모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누나의 아이였다. 


    왔으면 말을 하지. 왜 그렇게 서 있어? 


    누나가 옅은 미소를 띠며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는 텅 빈 바구니에 각기 다른 꽃을 하나씩 꽂았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발소리. 지하철이 들어올 때면 역사 안에 울려 퍼지는 거친 진동. 누나는 복잡한 환경에도 꽃꽂이에 열중했다. 나는 안쪽에 있는 유모차를 흘겨봤다. 누나는 아들을 낳았다. 홀로 아이를 지켜낸 누나의 손은 상처투성이였다. 잔 상처가 말끔하던 손을 망쳐놨고, 굳은살이 잔뜩 배겨 있었다. 이러고 있는 누나의 모습을 보니 속이 답답하기만 했다. 일은커녕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누나였다. 무엇이 누나를 저렇게까지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누나가 집을 나간 이후로 울적해진 집안 분위기가 무색하게, 누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내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떨던 누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집에는 연락 안 해?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뱉었다. 꽃을 만지던 누나의 손이 움찔거렸다. 누나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이 가만히 멈춰 서서 꽃잎만 만지작거렸다. 누나가 집을 나가던 날, 핏대를 세우던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바라봤다.


    이제 집으로 들어와. 이 정도 했으면 부모님도 인정하시겠지. 


    나는 꽃집을 구석구석 가리키며 말했다. 누나의 눈빛이 오늘 나를 만난 이후로 처음 흔들렸다. 그런 모습과는 다르게 누나의 입술을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누나는 굳게 다문 입을 좀처럼 열지 않았다. 지하철역 구석에 위치한 조그마한 꽃집. 누나가 모든 걸 견뎌내면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곳이었다. 그때,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서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나는 여기가 좋아. 


    누나가 아이를 품에 안으며 말했다. 


    돌아가자.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건데. 


    나는 누나에게 말을 던졌다. 이런 곳에서는 고생만 할 게 훤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게 누나한테도 아이에게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누나는 품에 안겨 있는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나를 응시했다. 나를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눈빛.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견디겠다는 굳센 눈빛이었다. 누나는 3년 전 모습과 달라져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누나는 3년 동안 누구보다 단단해져 있었다. 




    이제 돌아갈게.


    나는 누나에게 가벼운 인사를 던졌다. 누나가 조그마한 아기의 손을 쥔 채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누나와 아기의 손을 오랫동안 쳐다봤다. 부드럽고 여리던 손이 더 작은 손을 잡고 있었다. 누나의 손을 잡아줄 사람은 없지만, 전혀 허전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꽃집을 뒤로한 채 몸을 돌렸다. 매화.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가게 간판이 눈에 걸렸다. 누나가 이곳에 남으려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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