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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련강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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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정 May 24. 2023

가면 속의 마돈나

[산문] 백련강 - No. 4

    눈부신 네온사인의 빛이 거리 위로 흘러내립니다. 거리 위 그림자가 뱀의 갈라진 혀처럼 스멀스멀 기어 옵니다. 나는 뒷골목을 빠르게 빠져나옵니다. 코끝을 찔러대는 시큼한 알코올 냄새. 퀴퀴한 연초 향에 뒤엉킨 싸구려 화장품 냄새. 유흥가에서 풍기는 냄새들이 내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옵니다. 나는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습니다. 취객들이 난동 부리는 소리.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속을 게워내는 소리. 가만히 듣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습니다. 나는 늘 듣던 플레이 리스트를 재생시킵니다.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마돈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음악에 맞춰 조금씩 리듬을 탑니다. 전봇대를 붙잡고 토하는 취객. 헤드라이트를 킨 채로 경적을 울리는 소형차. 서로에게 거친 욕설을 뱉어내며 싸우는 사람들. 모두가 꼭 노래처럼 들립니다. 귓가에 들리는 음악으로 어우러져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듭니다. 

    오늘 밤 사이렌에서 연말 기념으로 최고의 인기 댄서를 뽑는다고 그럽니다. 사이렌은 제가 일하고 있는 곳입니다. 나는 항상 가면을 쓴 채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대에 오릅니다. 마돈나의 얼굴을 본떠서 만든 가면. 가면과 함께 쓰는 곱슬기 다분한 금발 가발. 가면을 쓰고 무대에 오를 때면, 마치 마돈나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사이렌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게 말합니다. 가면 속의 마돈나. 내 춤이 꼭 진짜 마돈나처럼 현란하게 보인답니다. 가면 속도 마돈나만큼이나 화려할 거라고 떠들어댑니다. 그럴 때면 사실 저야말로 진짜 마돈나가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제 춤선에 매료되어 환호성을 질러대는 손님들. 마치 팝의 여왕 마돈나처럼 손끝을 뻗는 나의 모습. 나는 손으로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을 어루만집니다. 갑자기 벅차오르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누군가 내게 한 말이 떠오릅니다. 너 같이 못생긴 여자는 댄서가 될 수 없다고. 뒷골목 클럽이 어울린다고.




    화려한 빛깔의 불빛이 번쩍입니다. 사이렌에 들어서자 이어폰 소리를 비집고 굉음이 들려옵니다. 나는 사람들 틈을 뚫고 구석에 있는 대기실을 향해 걷습니다. 대기실에 들어와 문을 닫으니, 클럽 안에 울려 퍼지던 노래가 먹먹하게 들립니다. 앰프를 욕조에 집어넣은 것처럼 말이죠. 그때 대기실 안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집니다. 미리 와서 준비하고 있던 언니들이 서 있습니다. 나를 철저하게 무시하며 평소에는 말도 안 걸어오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구석에 걸려 있는 의상을 태연하게 꺼내 입습니다. 언니들은 출근도 불규칙적으로 합니다. 열정적으로 춤을 추지 않습니다. 오늘 인기 댄서한테 주는 상금을 노리고 온 게 분명합니다. 돈은 어찌 되던 상관없습니다. 단지, 저 같은 마돈나가 열정도 없는 사람들에게 질 수 없습니다.

    나는 변변찮은 유흥업소에서 춤을 출 뿐이지, 엄연한 현대 무용 전공자입니다. 사이렌에 울려 퍼지던 노래가 변합니다. 그동안 연습해 온 익숙한 노래가 들려옵니다. 나는 무대에 오릅니다. 사람들의 환호가 들립니다. 사이렌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가면을 쓴 나를 언제나 반겨줍니다. 가면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가에 맺힌 땀방울. 쉬지 않고 춤을 추는 탓에 거칠게 들리는 내 숨소리. 언니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느껴집니다. 사이렌 안의 열기가 점점 뜨거워지는 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욱 열광적으로 타오릅니다. 왠지 오늘은 가면을 벗어던지고 춤을 출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물 만난 물고기라는 말이 이런 기분일까요? 나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춤을 춥니다. 당황한 언니들의 표정이 보입니다. 환호성이 잦아들고,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무대에서 가면을 벗은 건 처음입니다. 가면을 벗고 나니, 족쇄를 풀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춤을 춥니다. 




    온몸에 끈적한 땀이 흐릅니다. 찬바람이 닿을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나는 축축한 머리칼을 털어내며 대기실 복도를 걷습니다. 그때 웅성이는 말소리가 들립니다.


    금발 마돈나 완전 깨던데? 


    걔 그런 얼굴이었으면 좋아하지도 않았어. 


    나는 말소리가 들린 쪽으로 다가갑니다. 사이렌을 찾은 손님들이 한창 인기 멤버 투표를 하는 중입니다.


    가면만 안 벗었어도 일등이었는데, 얼굴이 좀 별로야.


    차라리 그 얼굴보다는 옆에 춤 못 추는 애들이 더 나은 듯.


    말소리가 뭉개지듯 천천히 들려옵니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가면을 만지작거립니다. 가면을 쓰기 전에 항상 들었던 말들입니다. 마돈나 가면으로 가려온 얼굴이 욱신거립니다. 나는 손에 든 가면을 씁니다. 


    그래도 춤은 제일 잘 추잖아. 춤 하나는 예술이지.


    황급히 벗어나려던 몸을 멈칫합니다. 나는 가면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습니다. 마돈나가 될 수는 없어도, 춤을 잘 추는 나로 남고 싶습니다. 나는 마돈나가 아닙니다. 가면을 조심스럽게 벗습니다. 사이렌의 탁한 공기가 오늘처럼 상쾌하게 느껴진 적이 없습니다. 나는 가면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무대를 향해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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