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에필로그, 라울

나는 글 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다

by 소담



이 글은 반려견인,
라울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상 이야기입니다

【 내 이름은 라울, 나는 반려견이다 】
5부-작별과 마무리
스물아홉 번째 이야기-에필로그, 라울


나는 하루라는 길 위를 천천히 걸었다.

그 길은 매번 다른 향기로 채워졌고, 다른 빛깔로 물들었다.

아침이면 창문 너머 햇살이 길게 드리우고, 나는 그 빛의 가장자리에서 하품을 했다.

윤 집사의 부스럭거리는 발소리가 현관 쪽에서 들리면, 꼬리가 먼저 반응했다.

그 소리는 ‘오늘’이 시작된다는 확실한 신호였다.


우리가 함께한 날들을 이렇게 글로 모아 놓고 보니, 그 하루하루가 결코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니었다.

풀잎 하나를 오랫동안 냄새 맡고 있던 순간, 간식을 기다리며 꼬리를 살짝 흔들던 순간, 부엌 앞에서 느릿하게 엎드려 윤 집사를 올려다보던 오후…

그 모든 장면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 ‘우리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그저 숨 쉬고, 걷고, 바라보고 있었지만, 윤 집사는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했다.


어느 날 아침,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은 아직 봄의 초입이었지만, 땅속에서 풀들이 움트고 있다는 걸 알려줬다.

나는 현관 앞에서 기다리다, 윤 집사가 리드줄을 꺼내드는 순간 벌떡 일어섰다.

그날 산책길 모퉁이에서, 바람에 실린 흙냄새가 내 코를 간질였다.

아직 눈에 보이는 꽃은 없었지만, 나는 이미 알았다.

며칠 뒤 그 자리에 분홍빛 진달래가 필 거라는 걸.

그리고 정말로, 윤 집사는 내 예언이 맞았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비 오는 날의 추억도 있다.

거센 빗줄기가 골목을 쓸고 지나가던 오후, 윤 집사는 우산을 들고 나를 데리고 나갔다.

나는 우산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골목 바닥에 그리는 동그란 파문을 오래 지켜봤다.

그 순간, 세상은 오직 빗소리와 나, 그리고 옆에서 우산을 기울여 주는 윤 집사만 남아 있는 듯했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비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윤 집사 체온이 섞인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나는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내 표정과 몸짓을 읽어주는 윤 집사가 있었다.

그 눈이 나를 따라오며 남긴 문장들은, 이제 나보다 오래 살 것이다.

내 발자국이 찍힌 이 이야기들은, 내가 떠난 뒤에도 여전히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 있을 것이다.


기억은 참 묘하다.

어떤 냄새는, 어떤 소리는,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 남는다.

첫눈이 내린 아침, 발바닥 아래서 들리던 ‘뽀드득’ 소리.

여름 저녁, 바람이 귀 옆을 스치며 데려온 풀벌레들의 합창.

겨울밤, 윤 집사의 무릎 위에서 들었던 심장 소리.

그 모든 게 나의 앨범 속에 있다.

그 앨범은 내가 꺼내 보지 않으면 빛이 바래지만, 윤 집사는 글로 그 앨범을 매일 꺼내 햇살을 쬐게 해 준다.


이 28편의 글 속에서 나는 계절을 한 바퀴 돌았다.

진드기로 끔찍해하던 날, 롱보드를 타며 가족들과 신나게 바람 쐬던 날, 처음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던 날, 장마철 창문가에서 세상의 냄새를 읽던 날.

그 순간들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고, 우리가 함께라는 증거였다.


나는 안다.

언젠가 나는 윤 집사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다시 이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내 하루는 이미 이 글 속에 살아 있고, 내 발자국은 문장 속에 찍혀 있으니까.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이 글들을 오래 간직해 달라고.

그리고 당신의 하루 속에서도 멈춰서 귀 기울일 순간을 찾으라고.

풀잎 사이에 숨어 있던 향기, 바람이 가져온 작은 이야기, 빗방울 속 반짝이는 하늘 조각…

그건 서두르는 발걸음이 놓치는 것들이니까.


나는 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오래 멈출 줄 알고, 조금 더 깊게 맡을 줄 안다.

그게 내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 특별함을 당신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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