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가 언제부터 좋아졌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에 나는 많은 시간을 책 읽기를 하며 보낸다.
그렇다고 남들 놀 때 구석에서 책만 파는 그런 학창 시절을 보내지도 않았다. 그때 나에게 책은 돈이 있어야 살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그건 어찌 보면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다. 정말 좋아했다면 어떡해서든지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학교를 졸업하고서도 난 책을 쉽게 살 수가 없었다. 그건 그보다 더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도 아니었다. 그 당시 나는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책을 산 다는 건 나에게 사치였다. 당장에 먹고사는데 들어가는 돈도 부족했던 때였다. 삶의 여유라는 게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다.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어렵사리 책을 읽는다 해도 그 시간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온전히 글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물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도 있었다. 도서관과 서점은 어쩌면 가고 싶어도 쉽게 갈 수 없었던 공간이었는지 모른다. 어찌 보면 내게는 책 읽기와 먹고사는 문제는 동전의 양면처럼 양립할 수 없는 영역이었는지 모른다. 한쪽이 해결되지 않고선 다른 한쪽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렇게 삶이 이끄는 데로 살아가는 게 익숙해질 때쯤,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삶이 흐름이 급격하게 바뀌어 갔다. 그건 마치 어느 시점이면 정확히 밀물에서 썰물로 바닷길이 바뀌듯이, 내 인생 전체가 이제껏 보여주지 않던 클라이맥스를 보여주듯, 암막커튼을 걷어올린 방 안으로 눈부신 태양빛이 거침없이 들어오듯, 영화 주인공처럼 어느 날 쨍하고 인생이 바뀌듯이,
나의 삶은 순식간에 바뀌어갔다.
그렇게 나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어 주던 돈이, 어느 순간 너무 쉽게 내 삶으로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내 인생에 펼쳐져갔다. 마치 해리포터의 마법처럼,
나는 아마 그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삶의 여유가 나에게 선물해 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기저 속에 항상 책 읽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책 읽기와 먹고사는 문제가 이율배반적이지 않는 것임에도, 내겐 양립되지 않았던 건, 그만큼 삶을 지탱해 주는 경제적인 문제가 시작부터 가난해서였는지 모른다. 가난에서 벗어나고픈 몸부림은 결국 행운의 열쇠를 내게 가져다주었고, 어디까지나 그건 몸부림친다거나 노력했다거나 하는 데서 오는 결과물이 아닌, 순전히 삶의 우연과 우연이 만나 우연히 만들어준 선물 일거라 생각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당시 태어난 쌍둥이 아들의 타고난 복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의 시간은 책 읽기에 양립되어 균형감이라는 삶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미역국에서 풍겨 나는 해산물의 바다향과 후드득 떨어지는 한낯의 소나기와 그로 인해 흙먼지가 보글보글 솟아올라 콧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비냄새와, 책 속에서 만난 글자들이 빚어낸 가공의 형상들과 이야기들이 끌어당기는 마법들을 좋아한다. 이런 좋은 것들 속에 스며드는 시간들을 사랑한다. 책 읽기도 이것들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읽는 것에 딱히 범위를 정해놓고 편집증적으로 읽지는 않는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있는 편이지만, 우연히 어느 작가의 소설과 만나는 날, 그때부터 편식하는 아이처럼 좋아하게 된 그 작가의 책들을 골라 읽는다. 더 이상 문장과 단어가 나를 흥분시키지 않을 때까지,
최근 난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책을 읽었다. 주로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책 주문을 하지만, 가끔 아내와 서점에 가서 책쇼핑을 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에 하나다. 난 서점에서 세 권의 책을 샀다. 그중 김상욱교수의 떨림과 울림을 먼저 읽어나갔다. 김상욱교수는 오르한파묵의 책을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난 오르한파묵이란 작가를 우연히 길을 걷다 마주친 사람처럼, 만나게 되었다. 난 순식간에 블랙홀로 빠져들듯이 오르한파묵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갔다.
책 읽기는 마치 태풍과도 같다. 모든 걸 집어삼키고 시간을 멈춰 세운다. 책을 읽다 보면, 눈뿐 아니라
뇌, 페이지를 넘기는 검지 손가락, 책 앞으로 당겨 앉은 굽은 허리, 보기 위해 움츠려진 어깨, 문맥에 따라 요동치는 표정, 거친 호흡, 평온한 맥박, 역류하는 혈류, 손등 위로 돌출된 푸른 정맥을 모두 사용한다.
온전히 몰입하는 것이란 이런 것이다.
나를 지울 수 있게 만드는 것,
자의식이 사라지는 순간, 글자 속으로 함께 걷고 있는 동선까지, 뽑히지 않는 거대한 바위둘레로 칭칭 감겨 가는 나는 그렇게 책을 읽는다.
내 이름은 빨강에서 방물장수 에스테르의 말처럼, 우리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책은 종이 위에 글자로 엮여 있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은 책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간 속에 녹아있는지 모른다. 타인의 표정과 관계는 우리에게 훌륭한 책 읽기가 되어준다. 삶의 행복이 먼데 있을 수 없음은 이러한 관계 속에 보물이 숨어 있어서다. 어느 날 그렇게 삶이 무료하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면, 책 한 권을 꺼내 읽어 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신발끈을 조여매고 늘 걷던 길을 걸어볼 것이다. 그래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이웃의 표정을 관찰하고, 그 속에 숨어있는 기쁨과 슬픔을 읽을 것이다.
책 읽기는 나에게 행복을 만들어 준다.
책을 읽다 보면 때론 아내가 사 오라고 세 번이나 당부한 계란한판과 두유 두 개를 바꾸어서 사 오기도 하고, 아이들이 오늘 학교에서 절친과 다툰 중요한 이야기를 들으며 딴생각을 하기도 하고, 요즘 성당에서 어떤 행사가 있고 이번주에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면서도, 오르한파묵의 소설이 왜 재미가 있는지, 기억하고 그린다는 것과 본 것을 그린다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폴오스터의 공중곡예사에서 주인공의 삶이 우연과 우연으로 겹쳐져 결국 나의 삶과 너무 비슷하지 않냐며 목에 힘을 주며 이야기하는 것들은 좋아한다. 책 읽기는 잃는 것들도 있고 얻는 것들도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된다. 태양빛의 넓은 파장대에서 결국 우리 눈에 닿는 빛의 파장은 좁디좁은 가시광선 파장밖에는 없는 것처럼, 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고주파 역시 너무 작거나 너무 시끄러운 소리는 귀에 와닿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보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아마도 그림 그리는 것과 책을 읽는다는 것의 동일함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