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 주문기 앞에서
키오스크 주문기 앞에서 만난 성인 (聖人, saint)
시내버스를 타면 안내양이 오라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누군가는 이야기하겠지만, 웬만한 버스에는 빵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쓴 안내양이 버스기사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던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그때가 까마득히 먼 과거도 아니다. 진화론적 설명을 빌리자면 지구상에서 어느 순간 공룡이 사라지듯이, 우리 주변엔 이렇게 눈 깜짝할 순간에 사라진 것들이 꽤나 많이 있다. 그런 것들을 일일이 나열하자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은 버스 안내양만큼이나 우리가 많이 접해왔었던 것들 중 한 가지다.
요즘은 어디에 가도 주문을 하려면 키오스크라는 자동주문기로 주문을 한다. 그건 식당을 떠나 주유소, 마트 그리고 병원이나 주차장과 관공서와 도서관에서도 사람이 일일이 주문을 받는 풍경은 찾아볼 수 가없다. 그렇다고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골목식당이나 한적한 휴양 지라면야 사람들이 친절하게 다가와 주문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너무나 당연한 그 풍경이 정겹게 느껴져 시키지 않아도 되는 요리를 하나 더 주문한다거나, 말 한마디라도 더 붙여보고 싶은 마음에 괜한 날씨이야기와 요즘 장사는 잘되냐며 친한 척을 하기도 한다. 그래봐야 두어 번 대화가 오고 가면 더 이상 나눌 이야기도 없어서, 서로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려 다른 곳을 본다던가, 걸려오지도 않은 핸드폰을 꺼내 들기도 한다.
여기까지가 대충 키오스크가 바꾸어 놓은 풍경이 이렇다는 거에 대한 부연 설명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오늘 키오스크 앞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장인어른이 입원하신 병원은 집에서 가까운 대학병원이다. 개원한 지 얼마 안 된 병원이어서 그런지 병원 로비도 널찍하고 병실도 깨끗해서 많은 환자들이 찾아오는 병원이다. 오래된 대학병원이나 조그만 개인의원에도 요즘은 키오스크로 입퇴원수속을 해오던 터라 일층 로비에 줄지어 서있는 키오스크등록기 앞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날은 이틀간 장인어른 병간호를 하느라 병원에서 잠을 잔 날이었다.
1407호실 방금 전 비어있던 옆침실이 채워졌다. 병실은 그 자리에 젊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서너 개의 수액을 꽂고 누워 있었다. 간호사는 수액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내일부터 항암이 시작된다고 했다. 젊은 아내는 남편의 두툼한 손을 잡았다. 장인어른을 모시고 두 달 전에 들었던 항암 이야기들 이였다.
그날은 아내가 감기에 걸렸다. 아내 대신 장인어른 간병을 하기 위해 오전 업무만 보고 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이틀밤을 장인어른 옆에서, 장인어른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간병을 위해 병원에서 자는 건 처음이었다. 장인어른은 배액관에 염증이 생겨 새로 시술을 받았다. 통증을 잡기 위해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갔다. 좀처럼 통증은 가시지 않았고, 장인어른은 밤새 뒤척였다.
늦은 밤 14층 병실에 누워 장인어른의 숨소리를 들었다.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땐 가슴 주위를 쳐다보았다. 얇은 이불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숨을 쉬고 있었다. 뒤척임도 없을 땐 조용히 어깨를 흔들어 보았다.
병실을 드나드는 간호사의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삐삐 시간마다 무엇을 알려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실은 일찍 잠들었다.
14층에서 이틀간 있다 보니 눈에 띄는 젊은 사람이 있었다. 이틀 전에 일층 로비에서 입원수속을 하던 그 사람이었다. 그 젊은 분이 왜 14층에 침실에 누워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이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였고 누가 봐도 한번 뒤돌아 보게 할 만큼 비율도 좋고 잘 생긴 청년이었다.
난 그날 아침 지하 일층에 있는 식당에 갔다. 병원 밖으로 나갈까도 했는데, 그냥 샌드위치와 수프를 파는 곳이 생각이 났다. 그렇게 이른 시간도 아니었는데 식당 앞 키오스크 주문기 앞에는 할머니들 몇 분이 주문을 하고 있었다. 바로 내 앞에는 줄무늬 환자복을 입은 키ㅈ큰 남자분이 여자친구와 팔짱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할머니들은 키오스크로 주문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어떻게 주문하는 건지를 모르는 듯했다. 나는 십 분 정도 기다리다가 목을 길게 빼고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마치 그렇게라도 쳐다보면, 할머니들의 주문이 빨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서서히 초조해지고, 조금 더 지나니 짜증이 나려고 할 찰나였다.
내 앞에 서계신 환자분은 링거봉을 잡고 있었는데 세네 개의 수액들이 달려있었다. 남자 환자분은 이어폰을 빼고 할머니들 곁으로 다가갔다.
"할머니 그 버튼 누르시면 됩니다"
네네 맞아요 거기서 옵션 누르세요"
"천천히 하세요 저흰 괜찮습니다"
순간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14층 환자분 이였다. 일층 로비에서 입원 수속 때 본 그 사람이었다.
14층이라면 거의 암환자들이 입원을 한 병동이었다. 주렁주렁 매달린 링거액들을 밀고 여자친구와 밝게 웃고 있는 그분은 암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사람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살고 있는 그분은, 길어지는 키오스크 주문 앞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친절하게 할머니들께 사용 방법을 알려 주었다.
누구에게 들려주면 거짓말처럼 들렸을 오늘 아침 키오스크의 친절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분은 무슨 암인지 물어본다는 게, 간호사가 이야기를 해줄지 모르지만,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그분이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것은 초기라는 몇 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