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Use Mar 27. 2021

내가 교양 있는 사람이라는 오만

아멜리 노통브 作 - <오후 네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집순이에게, 전화벨 소리는 공포스럽게 들려온다. 전화는 안 받으면 그만이라지만, 친하지도 않은 이웃이 매일 오후 네시에 내 집에 방문을 한다면? 그리고 그는 내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없는 척할 수도 없다면?


60년 넘게 교양 있게 살아온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멜리 노통브의 <오후 네시>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고등학교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치던 교사 에밀과 그의 부인 쥘리에트는 정년퇴직 날만을 꿈꿔왔다. 일, 연구, 사교 생활로부터 벗어나 전원생활을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65세가 되는 즉시, 둘은 속세를 떠나 시골의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간다.



집은 마을과는 4km 정도 떨어져 있었고, 건너편에 있는 단 한 채의 집에는 의사가 살고 있었다. 그들이 고른 집과 이웃은 완벽했다. 며칠 후 오후 네시, 초인종이 울리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웃집 남자 베르나르댕의 방문이었다.


동네에 집은 오직 두 채였고, 이웃이 새로 이사 왔으니 그의 방문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밀 또한 품위 있게 그를 대접한다. 이웃을 대접하는 에밀의 언어에는 지식이 넘쳐흘렀으며, 교양이 묻어났다.



에밀은 말이 별로 없는 베르나르댕을 보며, 그가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집을 찾아왔다고 판단했다. 에밀은 그를 과묵한 사람이라고 좋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음날 오후 네시에도 베르나르댕은 에밀의 집에 방문한다. 그리고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베르나르댕은 항상 오후 네시에 에밀의 집을 방문해 여섯 시까지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평생을 갈망해온 평화로운 생활을 막 시작한 에밀은,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그가 올 시간을 생각을 하며 괴로워한다.



"요컨대 말이야, 에밀, 우리가 그 사람에게 꼭 문을 열어 줘야 하는 걸까?"
"법적으로는 우리가 그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아도 돼. 우리에게 그 일을 강요하는 건 바로 예의라고."
"우리에겐 예의를 지킬 의무가 있을까?"
"예의를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데?"
"문제는 말이야, 쥘리에트, 꼭 그래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해낼 수 있는가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65년 동안 예의로 무장하고 살아온 사람이 한순간에 그걸 내던져 버릴 수 있을까?"
"우리가 언제나 예의 바르게 살아왔다고?"
"당신이 내게 그런 걸 묻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 안에 예절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가를 알 수 있지. 우리는 예의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의식조차 못 하게 된 거야. 무의식과 싸울 수는 없잖아."(53p)


할 말도 없으면서 남의 집에 불쑥 찾아오는 결례를 저지르는 베르나르댕을, 에밀과 쥘리에트는 단호게 거절하지 못한다. 그 시간에 산책을 나가 보기도 하고, 2층에 숨어 있기도 하지만 소용없다.


오히려 베르나르댕은 자신이 올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산책을 나가는 그들을 불쾌해하고, 집에 있는 걸 알고는 문이 부서질 듯 두드려 문을 열게 한다. 말을 시키지 않으면, 오히려 그런 그들을 굉장한 결례라도 범하는 사람들로 여겨지게 했다.



내 말 좀 들어 봐. 그는 예의라고는 없는 사람이야.
예의 없는 사람에게는 예의 없이 대할 권리가 있어.


에밀은 문을 열어 주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것을 알지만, 차마 그럴 수 없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며 에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혹은 답답해할 것이라 생각한다. 오지 말라고 왜 말을 못 하냐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에밀과 성격이 비슷한 나는 그의 모든 생각이 공감되었고,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픈 일이다...)



내가 한낱 소심하고 얼빠진 선생만 아니었더라도 그럴 용기를 낼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인간이란 자신의 성격을 선택할 수는 없는 법 아닌가. 소심한 자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속에 뿌리 깊은 의식이 있는 것 같아서 두려워. 성서에도 이런 구절이 있잖아. <누가 네 집의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라>고 말이야."
"당신이 그렇게 독실한 기독교도인 줄 몰랐는데."
"내가 그렇게 독실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누군가 내 집 문을 두드릴 때, 열어주지 않는 건 나로서는 불가능해. 그건 뿌리 깊은 거야. 선천적인 것만 바꿀 수 없는 게 아니야. 후천적인 특성 역시 어쩔 수 없는 게 있어. 근본적인 공민 의식이지. 예를 들자면 사람들에게 더 이상 인사를 안 한다든지, 더 이상 악수를 청하지 않는다는 게 나로서는 불가능한 것과도 같아." (125p)



숨 막히는 눈치 싸움 속에서 베르나르댕은 서서히 에밀을 파괴해갔다. 에밀과 쥘리에트는 베르나르댕의 부인을 함께 초대하자는 작전을 세우게 되고, 그녀가 집에 오면서부터 공포스러운 느낌까지 추가되며 이 책은 결말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 


마침내 나는 페넬로페의 신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신화의 전철을 밟는 자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밤이 되면 낮의 자신을 산산조각 내고, 아침이 오면 또다시 밤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던가? 


부인과 단 둘이 아무에게도 침해당하지 않으며 낙원을 꿈꾸던 에밀은 타인의 침범에 점차 메말라가고, 결국에는 평소에 알 수 없었던 자신의 내면이 튀어나오게 된다. 그들에게 타인은 지옥이었다.



타인의 도를 넘은 무례함은 평소에는 가지지 않던 분노를 불러 일으켜 여태껏 쌓아 둔 내면의 교양을 찰나에 무너뜨리고는, 내가 알지 못했던 자아를 보여준다. 그래서 여태 나로 알고 있었던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다.


아멜리 노통브는 그것을 소설에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녹여냈다.


과연 나는 위선적인 존재였던가. 내 생은 가식으로 점칠 된 것이었나.


무례한 타자만 없었어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고민들. 에밀의 생각과 행동이 극단적으로 치닫기는 하지만, 아마 베르나르댕이 없었다면 에밀 부부는 여유를 즐기며 행복한 노년을 보냈을 것이다. 교양 있고 기품 있게.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나오는 요조처럼, 이 책도 주인공인 에밀에게 공감을 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책이라 생각한다. 나는 노통브의 어느 책들보다도 이 책이 가장 재미있었고, 나와 비슷한 내면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지금 나는 눈을 바라본다. 눈 역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녹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눈이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이전 08화 문장은 어떻게 영혼을 구원하는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