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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Apr 12. 2022

에어포트 라이터

여행산문. 여행에세이

"여행은 어딘가로 가는 것일까, 어딘가로부터 떠나는 것일까."






내게 여행은 언제나 떠나는 행위에 의미가 있었다. 여행은 나를 숨 막히게 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이자 견디기 힘든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내게 목적지가 어딘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한 때 나는 여권을 늘 가지고 다녔다. 여행을 갈 계획이 없어도 늘 점퍼 안주머니에 여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언제든 충동적으로 떠나고 싶을 때 즉시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건 꽤나 낭만적인 발상이었지만 실은 나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는 일상에서 허우적거렸다. 내가 떠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떠난다는 건 사실 허황된 꿈 같은 바램이다. 그러나 그렇게 내 안주머니에 여권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게 나는 좋았다. 그건 마치 사표를 품고 다니는 회사원처럼 난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 걸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실제로 보다 적극적으로 떠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나는 떠날 때는 가능한 먼 곳으로 가는 걸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기차역이나 항구보다는 공항에 더 많이 가게 된다. 공항은 나의 탈출을 돕는 첫 관문임과 동시에 여행 도중에도 자주 들리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내게 공항은 바쁜 출국장이라는 느낌보다는 쉼터 같은 느낌이 있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는 떠나지 못하더라도 그냥 공항에 간 적이 자주 있다. 서울에 있는 동안 인천공항이나 김포공항에 탑승 목적이 없이 가는 건 내겐 도서관이나 공원에 가는 것과 비슷했다. 공항은 공항만의 분위기가 있다. 출국장이나 입국장에서 들리는 여러 나라의 언어들, 활주로의 바람소리, 비행기의 이륙 소리, 착륙하는 비행기 바퀴가 지면에 닿는 소리, 안내 방송 소리나 캐리어를 끄는 소리 등은 모두 하나의 공항 ASMR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공항의 한 구석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거나 수첩을 꺼낸다.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생각나는 것들을 쓰다 보면 어느새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공항은 내게 작업실 같은 곳인 것이다.


여행 중에 공항에 가야 할 때면 최대한 일찍 가서 탑승 시간까지 남은 시간 동안 글을 쓴다. 어떤 공항에서 환승을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항공권을 구입할 때 적당히 환승 시간이 긴 항공편을 선택한다. 그렇게 만든 한두 시간의 여유는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는데 좋은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여행을 떠난 후에는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동할 때 여유 있는 시간 계획을 세우는 게 좋은 것이다. 기차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기차 시간이 10시간 넘게 지연된다 하더라도 화내지 말고 주어진 그 시간을 여행하는 동안 떠오른 생각들을 기록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 시간이 감사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여행 중 걸으면서 순간순간 메모해 놓은 단어들을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문장으로 정리하곤 했다.


언젠가 나는 혼자 여행을 다니다 구입한 작은 수첩 표지에 에어포트 라이터(Airport Writer)라고 적었다. 그렇게 이름 붙인 그 수첩은 그 후 여행을 떠날 때도, 그냥 공항에 갈 때도 나를 따라다녔다. 이제는 종이로 된 수첩보다 노트북과 카메라를 가장 먼저 챙기게 되었지만, 나는 공항에 도착해서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서 아무도 내가 왜 공항에 왔는지 모를 거야, 라는 마음으로 주위를 쳐다보는 걸 즐긴다.

그런데 어느 날, 스케줄 없이 그냥 공항에 갈 때가 있다는 다른 사람을 만났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탑승 계획이 없는데도 공항의 분위기가 그리워서 공항에 간다는 그녀의 말을 들으니 동지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는 공항이 이동을 위한 곳이지만 우리에게 공항은 글을 쓰거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한 장소인 것이다.


여행을 떠날 때면, 특히 혼자만의 여행에 나설 때면 여행자는 어디로 간다는 설렘보다 어딘가로부터 떠난다는 쓸쓸함에 더 휩싸일 때가 있다. 여행은 평소의 일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그건 복잡한 관계와 머리 아픈 고민 같은 것들로부터 나를 단절시키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단절은 우리에게 자유와 사유의 시간을 준다. 고독과 말 없음은 낯선 곳에 온 이방인의 생각을 더 깊게 해 준다. 조금 외롭지만 많이 자유로운 것, 내겐 그것이 여행이다.


봄 빛을 머금은 하늘에 하얀 비행운이 늘어져 있다. 공항에 가고 싶은 날이다. 비록 항공권은 손에 쥐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남아도 나의 문장은 여행을 떠날 것이다.


/ 글, 사진. 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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