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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Dec 11. 2022

겨울 여행, 겨울 소리

여행 산문. 여행 에세이

”하지만 결국 돌아가야 한다는 운명을 거부하고 싶어서 나는 항상 눈 속에 발을 멈춘 채 머뭇거리는 것이다.“




사람들이 여름휴가를 떠날 때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대신 공기 중에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하면 비로소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겨울에 떠난다고 해서 따뜻한 지역을 찾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겨울이 오면 더 춥고 더 고독한, 아득히 먼 겨울 나라가 그립다.

나는 겨울이 되면 종종 가까운 홋카이도를 찾거나 가끔은 먼 아이슬란드로 떠나곤 했다. 그 푸른 고립과 고독이 그리웠던 것이다. 하지만 홋카이도의 한적한 료칸에서 먹고 자고 목욕만 하는 일과를 반복하거나 아이슬란드의 눈 덮인 공허를 통과하지 않고, 그저 삿포로나 레이캬비크 시내에서 머물기만 하더라도 괜찮다. 극야의 도시에 드리운 짙푸른 공기는 어떤 여행자에게는 너무나 깊고 쓸쓸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공기 속에 서는 것만으로도 충분 하니까. 나는 그런 푸른색이 언제나 그리웠다.


겨울 여행을 특징짓는 것은 색깔 말고 소리도 있다. 눈 오는 삿포로에서는 어깨까지 눈이 쌓인 인도를 걷는 사람들이 마치 액체처럼 흐르는 걸 볼 수 있는데, 그러다 교차로 앞에 서면 횡단보도 라인은 보이지 않고 흰 눈을 머리에 쓴 신호등만 깜박이고 있는 것이다. 삿포로의 신호등은 신호가 바뀔 때 짧은 멜로디를 들려준다. 그런데 그 멜로디가 마치 "삿뽀, 삿포로."라고 노래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길을 건널 때마다 미소 지었다. 어쩌면 그런 멜로디가 들리게 만든 건 폭설 속에서 소리만 듣고도 길을 건널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냥 그 멜로디가 겨울만 되면 흥얼거리는 신호등의 노래 같아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해 겨울에는 오타루의 어느 카페에서 다른 소리를 들었다. 그건 벽에 걸린 괘종시계 소리였는데 삿포로의 신호등 소리보다 훨씬 아날로그적인 소리였다. 요즘은 소리가 나지 않는 괘종시계를 장식으로 벽에 걸어놓은 카페 같은 곳들이 있지만, 실제로 시계추가 움직이며 댕댕댕 시간을 알려주는 괘종시계를 보는 건 쉽지 않다. 카페에서 매 시 정각에 울리던 그 괘종시계 소리는 마치 동화 속 세계로의 입장을 알리는 신호음처럼 들렸다.  

어린 시절에는 우리 집에도 커다란 괘종시계가 거실에 걸려 있었다.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었는데, 그때는 왜 집에 그렇게 시끄러운 괘종시계를 걸어놓고 날마다 아버지가 태엽을 감으시는 건지 궁금했다. 식구들이 잠들기 전에 꼼꼼히 문단속을 하고 괘종시계의 태엽을 감는 건 그 당시 아버지의 루틴이었다.

어느 겨울, 난 오타루의 어느 카페에서 창 밖의 푸른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러브 어페어'의 삽입곡인 피아노 연주곡이 들려왔다. 문득 영화 속에서 그 곡을 연주하던 캐서린 햅번이 생각났다. 여러 개의 액자가 올려진 피아노, 아네트 베닝의 하얀 드레스와 짧은 금발 머리, 그리고 캐서린 햅번의 연주에 맞추어 허밍 하던 아네트의 목소리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워렌 비티의 눈빛.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캐서린 햅번은 그 작품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거라는 걸 느꼈을까. 결국 그녀의 유작이 된 '러브 어페어'에서의 그녀의 연기는 볼 때마다 슬프다. 그 씬에서 캐서린은 괘종시계 소리를 듣고 피아노 연주를 멈춘다. 댕댕댕댕댕. "파이브 어 클락." 이제 가야 하는 시간임을 알리는 그 시계 소리가 마치 우리가 멈출 수 없는 삶을 말하는 것 같아서 쓸쓸했다.


겨울이면 떠오르는 모든 소리들은 과거의 소리들이다. 기억하는 모든 소리는 흘러간 소리들이고 그 순간 내 마음에 깃들었던 생각들도 이제는 아득히 먼 곳에 가있을 것이다. 눈 밟는 소리. 고드름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오로라가 나타나는 소리. 그리고 어느 겨울 당신에게 목도리를 감아주다가 당신의 뺨에 내 손이 스치던 소리. 푸른 겨울 공기 속에서 내가 들었던 소리들은 어느 겨울 어느 눈밭에 얼어있을까.

그해 겨울 삿포로에서 나는 괘종시계가 울리면 현실로 돌아가야 하던 영화 속 연인처럼 신호등 소리를 들으며 주머니 속의 항공권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결국 돌아가야 한다는 운명을 거부하고 싶어서 나는 항상 눈 속에 발을 멈춘 채 머뭇거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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