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된 기대와 실망, 드디어 임신.
화유라는 이벤트를 치르고 여전히 대조선 한 줄만 선명한 테스트기를 버린 지 또 3달째였다. 이제 그만 삼신할머니께서 우리 집에도 아기를 점지해 주시길 원했다. 크리스천 이면서 삼신할머니를 믿을 지경이었다. 유튜브에서 삼신할머니가 마른 꽃과 술병이 있는 집에는 아이를 잘 점지해 주지 않으신다 해서 모으던 와인병도 다 버리고 남편에게 받았던 드라이플라워들도 다 버렸다. 소주병도 마시는 그날그날 내다 버렸다. 아기용품이 있으면 이미 아이가 있는 집이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점지해 주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고는 남편과 술 마시며 종종 했던 보드게임들도 혹시나 해서 상자 속으로 다 집어넣었다. 임신을 기다린 지 1년 차, 난 미신왕이 되었다.
생리예정일을 이틀 앞두고 혹시나 한 테스트기에는 시약선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2줄이었다. 저번처럼 매직아이이긴 하지만 2줄이 맞았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희미한 2줄에 벌써 걱정이 되었다.' 또 화유면 어쩌지? 괜히 설레발치지 말고 기다려보자.'
다음날, 조금 더 선명한 두 줄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희미했다. 분명히 어제 보다 더 진해 진 거 같은데 여전히 매직아이 같았다. 내 착각인가 싶어 퇴근하는 남편을 현관 앞에 세워두고 테스트기를 들이밀며 물었다.
" 두줄이야, 두줄인 거 같지? 그렇지 않아? 초초초 매직아이이긴 하지만 이번엔 진짜 두줄인 거 같은데!"
내 촐싹거림에 남편의 입이 또 귀에 닿을 듯했다. 남편은 나를 꽉 안아줬다.
" 이번엔 진짠가 봐! 그래도 우리 너무 기대하진 말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잖아 기쁘지만 너무 티 내진 말자."
우린 애써 기쁘지 않은 척했다. 너무 기대하면 실망이 클지도 모르니까.
이번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이제 진짜 부모가 될 수 있는 건가? 점점 더 설레었다. 그전엔 희미한 두줄이 생리예정일 일주일 전부터 보였는데 조금 더 선명해진 두줄은 생리예정일에도 보였다. 전과 조금은 다른 상황에 내 뇌는 행복회로를 돌렸다. 별 지식이 없으니 그저 행복했다. 이번엔 진짜이길 빌었다.
3일 뒤 일하는 중에 배가 미친 듯이 아팠다. 어찌어찌 고객님 시술을 끝내고 배웅한 뒤 뒤에 잡혀있던 예약들을 취소했다. 배를 잡고 뒹굴었다. 집으로 갈 힘도 나지 않았다. 엄마와 함께 샵을 운영하고 있는 나는 엄마에게 '또 화유인가 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임신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도 화유를 경험했다는 것도 모른다. 배를 잡고 구르며 우니 무슨 애가 고작 생리통 때문에 손님들 예약을 취소하고 우냐고 핀잔을 줬다. 야속했다. 하지만 아기를 바랐는데 이번에도 안 생겼다고, 실패했다고 말하기엔 쪽팔리고 자존심 상했다. 엄마에게도 말 못 할 일이었다.
남편은 그날 일찍 퇴근을 하며 나를 데리러 왔다. 우린 역시나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아쉽고 슬펐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술을 줄이는 건 이제 포기했다. 아이를 갖는 거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계속된 실패에 조금은 지쳤나 보다. 매일같이 친구들을 만났고 집에 초대하며 자주 술을 마셨다. 술병을 매일 치우지도 않았다. 한 박스를 모아 가져다 버렸다. 꽃선물 받은 것도 이쁘게 말려 간직했다. 결혼식 때 부케 말린 것도 안방에 보란 듯이 전시했다. 보드게임을 다시 가져와 놀았다.
23년 4월 여전히 술을 자주 마시고 신나게 놀다가 문득 느낌이 이상했다. 표현하지 못할 느낌이었다. 그냥 뭔가 달라진 기분이었다. 뭐가 달라졌는진 나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졌다. 신체적으로 어디가 아프거나 묵직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었다. 기분이 뭔가 달랐다. 그날 난 술을 잔뜩 마셨다. 블랙아웃이 올 정도로 만취를 했다. 왠지 마지막 술 일거 같았다. 다음날 숙취로 깨질듯한 머리를 붙잡고 비틀비틀 화장실로 갔다. 몇 번째 인지 샐 수도 없는 행위를 나는 또 했다. 테스트기를 집어 들었다. 두줄이었다. 이젠 설레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전 두 번과 별 다르지 않은 희미한 매직아이였다. 이번엔 남편에게 아무 말하지 않았다. 다시 커뮤니티를 떠돌았다. 여러 사람들의 글의 읽었다. '화유 후 임신'이라는 키워드를 여러 매체에 검색했다. 전과는 기분이 달랐기에 엄마들이 하는 커뮤니티에 주절주절 글을 썼다. [화유 2번 경험 후 느낌이 이상해요 매직아이가 나타났는데 이번엔 진짜일까요? 사진첨부할게요.] 이번에도 역시 다들 엄마가 된 걸 축하한다고 했다. 기뻤지만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다들 방구석 의사 선생님들 이니까. 생리예정일 일주일하고도 3일 전이었다. 병원을 가려면 적어도 생리예정일은 지나고 가야 한다고 했다. 일주일 하고 3일을 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했다.
확실히 테스트기는 전과 달랐다. 다음날 아침 테스트기는 어제 확인한 것보다 조금 더 진해져 있었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테스트기 손잡이에 날짜를 적기 시작했다. 술을 끊었다. 길거리에 담배 피우는 아저씨들이 있으면 숨을 참고 지나갔다.
임산부는 먹으면 안 되는 것들도 많았다. 날것, 수박, 파인애플, 팥, 식혜, 초콜릿, 콜라 등 뭐 그리 가릴게 많은지. 열심히 메모했다. 음식을 가려 먹기 시작하니 진짜 엄마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긴장을 놓진 못했다. 이번에도 아닐지 모르니까.
생리예정일이 3일 지났다. 설레발 떨고 싶지 않았다. 테스트기는 드디어 '대조선역전'을 했다. 빨간 두줄이 선명했다. 우리 부부는 드디어 실감 나고 떨리기 시작했다. 남편이 토요일 휴무를 내고 둘이 같이 병원으로 갔다. 우리 동네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산부인과로 갔다. 병원에 가서 접수를 하고 문진을 했다. 마지막 생리일, 평소 주기, 과거 낙태여부등을 물었다. 별거 아닌데 굉장히 떨렸다. 친절한 간호사님의 미소에도 취조당하는 기분이었다. 괜히 얼굴이 빨개지는 거 같고 심장이 뛰었다. 간단한 문진이 끝나고 남편에게 가서 우리 아니더라도 실망하지 말자라고 얘기했다. 혈압과 몸무게를 재고 앉으니 그제야 조금 긴장이 풀렸는지 주변이 보였다. 배가 남산만 하게 부른 만삭 산모들도 있었고 우리처럼 부부가 와서 긴장된 모습으로 손을 마주 잡고 있는 분들도 보였다. 우리도 아마 지금 저런 모습이겠지. 미소가 지어졌다.
"하가영 님 들어가실게요."
내 이름이 불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질초음파를 했고 드라마에서 보던 사다리꼴의 초음파장면을 드디어 마주 했다. 동그랗게 빈 공간이 보였다. '저게 아기집인가?'라고 생각했다. 의사 선생님은 아직 임신을 확신할 수 없다고 하셨다. 피검사를 하고 수치로 알아볼 수 있다고 하셨다. 피검사를 하기로 했다. 위층으로 올라가서 피를 뽑고 병원을 나왔다. 오늘 바로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라는 결과를 기대했지만 역시 끝까지 쉽지 않았다. 바로 산모수첩을 받고 보건소에 임산부 등록을 하러 가야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3시간 뒤에 문자로 알려주신다고 했다. 신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자식을 만들어 준다고 하던데 끝까지 피가 말리는 기분이었다. 임신에 있어서는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3시간 뒤 피검사 상 임신 수치가 120이라고 임신이 맞다고 했다. 2주 뒤에 다시 병원에 방문하라고 했다. 드디어 내가 엄마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부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