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싶지만 먹고 싶지 않아.
남편을 시험에 들게하는 식욕
4월 초쯤 꿨던 꿈이 생각났다. 따사로운 햇볕이 집안을 온통 비췄고 황금빛 햇살아래 분홍 벚꽃잎들이 안방 창문을 통해 침대에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와. 예쁘다'라고 생각하곤 거실로 나오니 거실 창문도 활짝 양쪽으로 훤히 열려 있었고 거실에도 분홍 벚꽃 잎이 예쁘게 흩날리고 있었다.
평소 성격 같았으면 예쁜 쓰레기다 싶어 창문을 닫고 꽃잎을 쓸어 담아 버렸겠지만. 꿈속에서 그것들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포근했고 행복했고 따사로웠다.
벚꽃꿈을 꾼 다음날 나는 남편을 끄집고 복권집으로 가서 로또를 샀다. 남편은 꿈 이야기를 듣고는 연금복권과 긁는 복권까지 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로또가 아니라 태몽이었나 보다.
피검사결과가 나왔고 우린 드디어 부모가 되었다는 생각에 들떴다. 유튜브나 드라마에서는 임신축하파티도 하고 그러던데 우린 그런 것도 없었다. 혹시나 잘못되지 않을까 혹시나 들떴다가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 또 조심했다. 화유의 경험덕에 마음이 단단해진 듯했다.
피검사 수치로 임신을 확인받고 이주나 흐른 뒤 드디어 초음파 검사를 하러 병원에 갔다. 2주간 이날을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병원에 가서 질초음파를 했고 드라마에서 보던 사다리꼴의 화면에 동그란 반지모양의 링이 보였다. 의사 선생님께선 이게 난황이라고 하셨다. 링 주변을 검게 동그란 공간이 있는 듯 보였는데 그게 아기집이라고 하셨다.
"아기집과 난황이 모두 보이네요. 축하합니다 임신이 맞습니다."
임신 5주 차라고 말씀해 주셨고 출산예정일은 내년 1월 28일이라고 하셨다. 이제 드디어 난 임산부가 되었다.
진료가 끝나고 진료실을 나오니 병원에서 주는 임신 축하선물을 받았다. 아기 손수건과 임산부가 챙겨야 할 영양제 같은 것들이었다. 임신 전부터 이것저것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찾아본지라 임산부가 섭취해야 할 영양제는 이미 챙겨 먹고 있었다. 산모수첩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심장소리를 듣고 주신다고 다음진료 때 산모수첩을 챙겨주신다고 했다.
병원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상담실로 안내받았다. 태아보험 상담과 각종 영양제 상담이었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이미 정보를 들었기에 상담실에선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병원을 나오니 그제야 실감됐다. 괜히 내 배가 소중해졌다. 남편과 임산부에게 좋다는 추어탕을 포장해서 집으로 갔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샘솟았다. 갑자기 성사된 엄마라는 감투에 흥분해 들떠 있었다.
그날부터 집에 과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5월이라 수박이 아직 비쌀 때였는데 수박도 사고 바나나도 사고 우유와 계란, 오렌지주스도 샀다. 임산부에게 좋다고 들은 건 죄다 사 모았다. 평소에 과일이나 주스등의 간식을 먹지 않았지만 '귀찮아도 챙겨 먹자 나는 엄마다!'라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먹었다.
과일을 사 먹으면서 알게 됐다. 평소 과일이라곤 소주 마시며 시킨 과일안주가 다였던 나는 내가 바나나를 안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소주와 함께 소주의 쓴맛을 달래려고 먹던 그런 맛이 아니었다. 그저 텁텁하고 나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결국 남편에게 바나나를 권해 처리를 맡겼다.
티비를 보니 겨울에 딸기 먹고 싶다 해도 남편이 사다 주고 여름에 붕어빵이 먹고 싶다 해도 구해와서 주던데 난 딱히 뭐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인스타에서 유행하던 약과나 한번 먹어볼까 하는 마음에 남편에게 "요새 약과 사려고 약켓팅 한다던데 나도 사줘"라고 했다.
3일 뒤 인스타 유명인이 공구하는 약과가 집으로 배달됐다. 남편에게 물으니 오픈시간에 맞춰 실제 약켓팅이란 걸 했다고 했다. 귀엽고 고마웠다.
인스타에서 또 납작 복숭아를 접했다. 남편에게 또 먹고 싶다고 했다. 10개에 10만 원 가까이하는 줄 알았으면 사달라고 하지 않았을 텐데 남편은 또 납작 복숭아를 구해다 줬다. 말로만 듣던 임산부에게 먹고 싶은걸 다 구해다 주는 환상의 남편이었다. 오랜만에 남편이 멋있어 보였다. 남편은 납작 복숭아를 건네며 제발 인스타 좀 그만 보라고 했다.
약과도 납작 복숭아도 결국 혼자 먹지 못하고 다 가게로 들고 가 나눠 먹었다. 군것질을 즐기지 않는 게 임신을 했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았다. 그저 임신했다는 사실에 근거 없는 호기로움이 샘솟아 남편을 시험에 들게 했다.
23년판 임신육아 대백과도 구매했다. 임신 5주 차, 갓 엄마가 된 나는 궁금한 거 투성이에 초보 임산부인 게 티가 날 만큼 열정적이었다. 책에서는 모든 걸 조심하라고 했다. 음식도 움직이는 것도. 하지만 뱃속에 생명이 있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드라마에서 음식냄새 맡으며 '우웩'거리는 그런 일도 없었기에 실감 나지 않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뛰어다니기도 했고 무거운 걸 들기도 했다. 여전히 일도 바쁘게 했다. 그저 들뜨고 철없이 엄마가 됐다는 기쁨 그 기분을 만끽하기만 해도 황홀했다.
임신 사실을 한참 만끽하며 남편과 대망의 태명 짓기도 시작했다. 열 달 무럭무럭 자라라고 열무, 튼튼하게 잘 자라라고 튼튼이 올해가 토끼의 해라서 토끼 관련해서 토순이, 토깽이, 토토, 토복이 태명을 된소리로 지어야 뱃속의 아이가 잘 듣는다고 해서 낑깡이, 똑똑이, 탄탄이 등등 여러 태명들이 순위에 오르락내리락했다.
흔하게 남들도 다 짓는 태명은 싫었던 나는 인터넷에 '태명으로 짓기 좋은 순우리말'을 검색하다가 "다올"이란 단어를 찾았다. 세상 복 다 오라는 뜻을 가진 순 우리 말이었다. "다올"에 꽂힌 나는 남편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남편은 명품 "디올"같고 좋다고 했다. 서로 뜻한 바는 다르지만 우린 우리 첫 아이의 태명을 다올이라고 지었다. 이후 남편은 술만 마시면 내 배를 잡고 따올 따올 거리는 따오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