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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소 Aug 24. 2023

미워했던 시아버지가 쓰러지셨습니다.

두 가지 마음



  

펑펑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은 남편은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급하게 외투 하나를 챙겨 들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카톡) 아빠가 아프신 것 같아. 집에 좀 다녀올게.'

얼마 전부터 조금씩 이상 증세를 보이신 아버님은 결국 뇌경색 판정을 받으시고 병원에 입원을 했고, 수술을 받으셨다.

내가 시댁에 안 갈 거라고 선포한 지 불과 3개월 정도 되었는데 아버님이 입원하셨다니, 다시 시댁 식구들을 봐야 하는 건 아닐까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어려웠지만 수술하신 다음 날, 남편과 함께 아버님을 뵈러 병원에 갔다.

아주 많이 미워했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누워 계신 아버님을 보니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보이시는 건지, 마음에 뜨거운 무언가가 일었다. 이런 감정이 드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이러다 또 마음이 약해져 시댁에 휘둘리며 살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렵기도 했다.

기력 없이 누워 계신 아버님을 보니 나이 듦이란 무엇인가 몹시 허탈했다. 평소 양주, 소주, 위스키 가리지 않고 폼 잡으며 술을 드시는 아버님이 아닌, 아주 늙고 볼품없는 노인이 한 분 누워 계셨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런 모습 보이실 거면서 저한테 그렇게 못된 말씀 많이 하셨어요?'

흐르던 눈물을 꼴깍 삼키며 아버님께 건강하게 잘 회복하실 거라고 ,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집에 돌아왔다. 아프시다고 하니 나 역시도 마음이 무거웠다.

사람이 밉다고 아프시길 바란 적은 없었으니까.

'아버님, 빨리 회복하셔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술을 마음껏 드시고 사셔야죠....'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의 결혼생활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했던 기억들,
어머니 생신 때 드린다고 케이크 만들던 날, 시댁 식구들 초대한다고 남편하고 꽁냥꽁냥 음식 만들던 날, 아이가 태어나고 좀 더 넓은 평수로 이사 가기 위해 시부모님과 집 보러 다니던 날.....

분명히 노력했었다. 첫 만남부터 최악은 아니었다. 술을 드시지 않던 날에는 가끔은 좋은 말씀도 해주셨는데.

예쁨 받고 싶었다. 칭찬받고 싶었다. 그럼 난 더 잘 지낼 수 있었는데.....

이미 어긋나 버린 마음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가슴 시리게 야속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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