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혼 10년이 다 돼가는, 어느 정도 내공은 있는 며느리이다. 거기다 시댁에 프리선언을 한 내 멋대로 사는 며느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주 가끔이라도 시댁에만 다녀온 다음이면 생기는 후유증들이 있다.
첫 번째, 원래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 남편이 더 싫어진다.
결혼 초이건 지금이건, 시댁에만 다녀오면 나는 여러 가지 상황들과 시부모님의 직설적인 말투에 여전히 상처를 받고 돌아온다. 예전에는 남편이 달라질 거란 기대를 했지만 지금은 시댁과 나 사이에서 해야 하는 남편의 역할에 대한 기대감은 제로이다. 나는 남편이란 사람이 시댁에서 맹꽁이 같이 있는 모습을 수도 없이 겪어봤기에 그를 두 번 다시는 믿지 않는다. 와이프가 시댁에서 상처를 받아 마음에 병이 생겼음에도 단 한 번의 액션을 취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편이란 작자는 집에서 와이프만을 바라보고 아주 가정적이며 자녀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 아빠도 딱히 아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본인 가족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의 스트레스를 받은 아내를 위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밥만 잘 먹고 화장실만 잘 가고 잠만 잘 잔다.
두 번째, 이런 시댁 만난 나를 지독하게 연민하는 시간이 생긴다.
왜 하필 이런 집안의 사람들을 만나 마음고생을 하고 있을까 내 인생을 연민하며 원망한다. 적당히 술을 마시던지, 아예 마시지 않는 품위 있는 집안의 가족들을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들만 많은 집이 아니라 외동아들이거나 차라리 시누이였으면 어땠을까.
이혼을 하지 않는 이상 어찌 됐건 계속 소식을 들어야 하고 봐야 하는 사람들인데 여태 나쁜 짓 안 하고 바르게 살아온 나에게 이런 시련이 생긴 걸까.
자기 연민은 나의 인생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무의미한 것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다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 것 같은 죄책감 마저 들게 된다.
세 번째, 두통과 위염이 생긴다.
시댁에만 다녀온 날이면 일주일에서 이주일정도는 소화제와 타이레놀은 필수다. 이번 결혼식 이후 계속 소화제와 두통약을 먹고 있다. 몸이 반응한다. 그 집안에만 가면 병이 생긴다.
네 번째, 무기력증으로 만사가 귀찮다.
평소 하던 살림이나 식사 준비에 대해 손을 놓게 된다. 저 딴 인간의 밥을 내가 왜 해줘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와이프가 식욕을 잃고 끙끙 앓고 있음에도 밥만 잘 먹고 핸드폰만 열심히 본다. 남편의 심경에는 변화가 없어 보인다. 참... 내 남편은 오~~ 래오래 장수할 상이다.
다섯 번째, 우울감이 심해진다.
처음부터 시댁과 잘 지내고 싶지 않고 미움받으며 살고 싶은 며느리는 없을 것이다. 나는 관계를 중요시하고 마음 맞는 사람들과는 아낌없이 애정을 표현하고 챙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배우자의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은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도 처음부터 쿨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자존감도 많이 상하고 내가 남편에 비해 못난 것은 아닐까 자괴감도 든다. 내가 특별히 나쁘게 한 것도 없는데, 나는 잘 지내고 싶었고 어머니 아버님께 예쁨 받고 싶어 손 편지에 쿠키에 케이크에 미역국에 온갖 손수 만든 것들로 재롱도 무지 떨었는데 도대체 왜 나에게 하찮게 대해주셨던 걸까.
맞지 않는 시댁과의 관계는 세상 가장 어려운 인간관계 레벨 중 최고 버전인 것 같다. 하나님이나 부처님 같이 신이지 않고서야 처음부터 웃으며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분명 조금씩은 나아지고 있지만, 시댁에서 아무리 날카롭게 나를 할퀴고 찌를지언정 내 마음에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그날까지 나는 나 자신을 뜨겁게 사랑하며 차가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번 추석, 시댁에 가지 않았다!!n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