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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텐텐은 이런 맛이구나

by 빛나는

손바닥에 놓인 작은 금빛 봉지에는 빨간 글씨로 크게 ‘텐텐’이라고 쓰여 있었다. 한때 엄마들 사이에서 품귀 현상이 일어날 정도로 인기가 있었던 어린이 영양제라 그 맛이 궁금했다. 막 껍질을 벗기려고 하는데, 흰 글자로 적힌 ‘성장과 발육’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간식인데 어른인 내가 먹어도 되는지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국 봉지를 뜯었다. 미세한 약 냄새가 코를 타고 전해졌다. 다른 젤리류 간식처럼 달콤한 향이 느껴지지 않아 한 번 더 주저했다. 하지만 이 조그만 알갱이를 전해주던 손길이 떠올라 바로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작년 7월, 동네에 있는 재활스포츠센터에 신설된 ‘아기와 함께하는 수영’ 반에 등록했다. 당시 18개월이던 아이를 키우느라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어 답답했던 차였다. 수강 인원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자마자 바로 신청 버튼을 눌렀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일정이 생긴다는 기대감에 설레기까지 했다. 개강 연락을 받고 나서야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재활’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장애인과 함께 하는 곳이라는 걸.


아기를 데리고 탈의실에 입장하면 늘 환호성이 터졌다. 같은 시간 대 운동을 오신 할머니들로부터 나오는 탄성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언제나 아기의 양손에는 군것질 거리가 가득했다. 사탕, 초콜릿, 약과 등 모두 아기가 어려서 먹지 못하는 음식이지만 감사함으로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에서 아이가 잠이 들면, 할머니들의 사랑이 담긴 먹거리들은 전부 다 내 입으로 들어갔다.


센터에 다닌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예상치 못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에선 항상 아기 엄마로만 불렸기에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같은 학과였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대학 동기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냐며 인사를 건네는 친구의 표정에 혹시나 하는 물음표가 보였다. 아마도 나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아, 나는 일반 자모 수영 왔어.”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보다 애매한 사이의 어색함이 더 커서 그런지 할 말이 많지 않았다. 날씨 같은 가벼운 주제로 몇 마디를 나눈 뒤 의미 없이 연락처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주차장에 도착해 운전대를 잡고 나서야 굳이 ‘일반’이라는 단어를 덧붙여야만 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그 친구가 장애가 있는 아기를 키운다는 소식을 다른 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던 터라 나도 모르게 경솔한 선을 그은 것이었다. 직접 듣지도 않았는데,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미안함을 전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이유로 사과를 한다고 해야 한단 말인가.


사실 이곳을 다니면서 놀란 감정을 숨기기 위해 연기를 해야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몸집이 큰 데도 어린아이처럼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는 장애인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져 버렸다. 아이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보고 내 뒤로 숨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창피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건네라고 말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곁에 있는 보호자의 속상한 표정을 알아챈 지도 얼마 안 됐다. 잘못한 일도 없는데 먼저 죄송하다고 말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가로막는 사람들. 비슷한 시간대에 종종 스치듯 인사를 하고, 몇 마디씩 안부를 나누며 숨겨둔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이후로 당황스러운 상황이 생겨도 최대한 밝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센터를 오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을 때, 어떤 장애인을 만났다. 키가 작고 앙상한 팔다리를 가진 그녀는 햇빛이 잘 들어오는 1층 창가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눈에 띄는 파란색 잠바를 입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머물렀다. 확실한 병명은 알 수 없으나 행동이 약간 부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건물이 떠나갈 만큼 크게 소리쳤다.


“너무 귀여워!”

아무런 해가 없는 사랑스러운 말인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내 주위를 엄습했다.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우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몸집이 작아 어린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순간 덜컥 겁이 나서 아기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는 아기의 남은 손을 덥석 잡고 악수하듯이 마구 흔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누나에게 인사하라는 말을 내뱉었다. 아직 두 돌도 되지 않은 아기가 잡힌 손을 빼 버리고 싫다는 표현을 하면 어떻게 될까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혹시라도 그녀가 기분이 나빠지면 어쩌지.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누는 매우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에게는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담당 선생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그녀를 불렀고, 우리는 차로 돌아왔다.


몸에 땀이 식어 옷 안으로 한기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경험하는 긴장감이었다. 마음을 다잡고 차의 시동을 걸려고 하던 찰나,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그녀였다. 차에서 내려 최대한 친절하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답했다.


“이거, 아기가 좋아하는 거래요.”

소녀는 작은 봉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텐텐’이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고맙다는 말을 다 미처 끝내기도 전에 그녀는 뒤돌아 빠르게 뛰어갔다.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를 두 번씩 소리치면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라도 안도감을 가졌던 것 역시 부끄럽고 미안했다. 다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는 그들에게 희미한 선을 남겨두고 있었다. 소녀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며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진짜 몸만 자란 어린아이는 내가 아닐까.


집 아래에 주차를 하고 주머니에서 ‘텐텐'을 꺼냈다. 알갱이를 두 세 차례 씹으니 익숙하지 않은 씁쓸한 달콤함이 입안에 퍼졌다. 잔기침이 날 정도로 설탕을 쏟아부은 한약 같았다. 뱉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올라왔지만 꾹 참고 꼭꼭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다. 차마 버릴 수 없는 맛이었다. 역시 성장과 발육엔 텐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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