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 생각지 못했다. 마흔이 넘어 오래간만에 전화 온 친구가 결혼 소식을 전하리라고는.
20대 30대 때는 뜬금없이 전화가 오거나 문자가 오면 '결혼하나?'라는 생각부터 들었기에 친구나 지인의 결혼 소식에 당황하지 않았다. 의래 이런 일이라도 있어야 서로 얼굴이라도 보는구나 하며 좀 속 보이는 연락에도 그러려니 했다. 다들 그러니까.
40대가 되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가 우연히 연락할 일이 생겨 가볍게 인사를 나누다 보면 이미 결혼을 했다면서 혹은 벌써 아이가 둘이라면서 이런저런 경조사가 있었음을 주고받는다. 그냥 그렇게 축하를 하기도 위로를 건네기도 하는 나이가 되었다 생각했다.
그래서 였을까?
몇 시간이나 걸려 가야 하는 타지에서의 결혼식에 참석할 만큼 지금 우리가 그런 관계인가? 학창 시절 오랜 친구였기에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나온 마지막 인사 ' 청첩장은 얼굴 보면서 받고 싶네' 무의식적으로 확인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적어도
20년 넘는 친구라면,
몇 년 만에 전화해서 결혼 소식을 전하는 거라면,
왕복 이동만 6시간 거리의 결혼식에 초대할 정도로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친정집 올 때 잠시 짬을 내어 청첩장이라도 얼굴 보며 전해줘야 하지 않을까?
기대는 1도 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며 왠지 모를 씁쓸한 허무함으로 전화를 끊는다.
결혼식 몇 주 전 메시지로 보내온 청첩장과 이런저런 설명들. 고민 없이 의례적인 축하 인사와 여운을 남기며 휴대폰을 덮는다. 생각이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늘 부여잡고 있던 관계들. 나름 관계 정리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찝찝함이 몰려온다. 몇 년 이상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면서 내심 가깝다고 느꼈던 나만의 미련들이 참 많구나 싶어 휴대폰을 다시 꺼내 친구 목록을 들여다본다.
친구인가? 지인이 맞나?
렌덤으로 틀어둔 뮤직 재생 목록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귀에 꽂히는 가사, 기막힌 타이밍이다.
"빛이 바랜 추억들이 옷깃에 묻은 인연들이 이젠 지워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대도 함께 할래요?"
"네!"
소리 내어 대답하는 내가 웃긴다. 노래 제목을 확인하고 가사를 찬찬히 읽어보며 '아! 그래! 이렇게 명료한 생각을 난 하지 못했구나.' 싶다.
항상 머릿속으로 천천히 정리하면서 다 정리했다며 뒤돌아서서 뭔가 남아있는 감정과 반복되는 관계에 고민했었는데,
"머릿속에 쌓인 먼지들 하나씩 틀어내다 한꺼번에 움켜쥐고서 세탁소로 향하는 내 발거음 유난히 가볍다."
'아~'끄덕이는 내가 또 웃긴다. '하나씩 정리할 일이 아니구나. 한꺼번에 움켜쥐고 리셋해야 하는 것이었구나.' 한다.
"이곳을 오는 길에 또 묻었죠. 색 다른 얼룩이 조만간 또 와야 하겠네요."
'아~~~'또 명확해진 정의에 끄덕이는 내가 좀 난감하다. 늘 관계 속에 살아간다. 지웠던 관계도 다시 인연이 되면 새롭게 시작하면 되고, 지금 의미 있는 주변의 많은 관계도 언젠가는 빛이 바랜다. 이젠 세탁소로 가면 된다.
너무나 복잡하고 불편했던 이야기를 이렇게 밝은 멜로디로 가볍게 표현해낼 수도 있구나 싶다. 덕분에 내 마음도 더없이 맑고 가벼워짐에 감탄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빛이 바래고 선명했던 자국이 지워내야 하는 얼룩이 될 수 있다. 세월이 무색하게 간단히도 지워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의 끝에 나 또한 이미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을 텐데 싶어 오히려 더 가볍다.
마음의 다이어트로 한 층 건강해졌으리라.
평생 빛이 바래지 않을 흔적 하나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는 하루사리에게 신사임당의 지혜도 언젠가는 생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