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잦은 기침에 시달린다. 목을 많이 써서 그런지 집안 내력 때문인지 나도 일찌감치 천식을 예약해 놓고 사니 그닥 새로울 일은 아니지만, 신경이 많이 쓰인다. 간절기마다 찾아올 때면 가끔 약을 처방받기는 하나, 아직 약을 달고 살 만큼의 수준은 아니다. 이번 환절기에도 어김없이 찾아드는 반갑지 않은 손님맞이에 분주해진다.
물 많아 보이는 잘생긴 배를 골라 속을 파내고 꿀을 채워 중탕한 배숙을 만들고, 도라지를 물이 반으로 줄 때까지 다려 도라지 차를 준비한다. 몇 가지 단방약 중에서도 팬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소금을 솔솔 뿌려 볶은 은행은 그 연둣빛의 고운 색감과 짭조름한 맛, 말캉하게 씹히는 식감이 좋아 곁에 두고 몇 알씩 먹는다. 오늘도 은행을 볶으면서 그 옛날 외갓집 마당의 은행나무와 할머니를 생각한다.
방학이 시작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진해에 있는 외할머니댁으로 나를 보내려고 엄마는 짐을 꾸린다. 내일이면 사촌오빠가 데리러 올 것이고, 오빠를 따라 할머니 댁으로 갈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겨울방학이면 외할머니댁에서 살다시피 했으나 그것도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할머니의 용각산 냄새를 맡을 생각에 벌써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5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이제 몇 달 후면 나도 6학년이 될 텐데, 친구들과 모여 공부하기로 했다는 나의 엉성한 거짓말은 꿀밤으로 돌아왔고, 막내였던 엄마는 할머니 속을 너무 많이 썩여드렸다는 말을 덧붙이신다. 엄마가 썩힌 할머니 속을 왜 내게 풀어주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마의 효도 특사가 되어 할머니 댁으로 또 향했다.
내가 기억하는 이 연중행사는 일곱 살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의 착오 아닌 착오로 유치원에 일 년 먼저 들어가서 졸업을 하니 일곱 살이었다. 일곱 살에 학교에서는 받아주지 않았고 할 수 없이 집에서 놀아야 했다. 친구도 별로 없어서 심심해하던 나를 엄마는 외할머니댁에 보냈다. 그때 벌써 할머니 연세가 일흔이 넘으셨다. 성근 하얀 머리를 뒤에서 쪽을 지시고 늘 곰방대를 들고 계셨다. 인상부터가 무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일찍 남편을 여의고 아홉 남매를 기르고 거두셨으니, 할머니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중성에 가까웠다. 첫째인 외삼촌이 결혼할 무렵 엄마가 태어나 내게 외삼촌은 거의 할아버지뻘이었고, 사촌 언니 오빠들도 내게는 너무 먼 그들이었다. 할머니가 적적하셔도 언니 오빠들은 자신들의 공무에만 바빴고 손자 손녀들이 줄잡아 스물은 되었지만, 중학생만 되어도 할머니와 놀려고 들지 않았다.
가을이 절정이었다. 아침부터 사촌 오빠들이 기다란 장대를 들고 할머니 댁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를 연신 두들겨 댔다. 그러자 노란색 구슬 같은 은행알이 후드득후드득 떨어졌다. 신기해서 그 알맹이들을 바구니에 주워 담았는데 은행의 겉껍질 터져서 나는 비릿하고 구린 냄새가 하루 종일 따라다녔다. 외가에서는 할머니의 심한 해소 천식 때문에 가을이면 은행을 따서 보관하는 일을 정성스럽게들 하셨다. 외숙모가 얌전하게 은행을 볶아 내 오면 할머니는 따끈하게 데운 청주 한 잔과 함께 드셨다. 나도 할머니 옆에 앉아 맛도 잘 모르면서 은행알을 날름날름 집어넣었다.
무료하셨던 할머니는 일곱 살짜리 손녀에게 화투를 가르치셨다. 물론 같은 짝을 맞추는 민화투였다. 아이가 영특(?)했던지 곧잘 할머니의 상대가 되었다. 돈 대신 사탕을 놓고 할머니와 손녀는 저녁만 되면 치열하게 마주 앉았다. 자상한 큰 사촌오빠는 퇴근 때 늘 사탕 봉지를 들고 나타나 할머니와 나의 대결을 참관하곤 했다. 일곱 살 시절에 거의 6개월을 그렇게 할머니와 손녀는 친구가 되었고 그 후에도 겨울방학만 되면 늘 할머니 댁에서 한 달여를 지내다 오는 것으로, 엄마의 빚을 조금씩 갚아나갔다.
5학년 겨울방학을 할머니와 보내고 6학년도 절반이 훌쩍 넘어섰을 때, 초가을 햇살이 볶은 은행처럼 노릇노릇해질 때 할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그 나이에 죽음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처음 맞닥트린 것이다. 이 세상에 없는 것도 만들어 내어 그리워한다는 사춘기 나이에 둘만의 오롯한 추억을 남기고 할머니는 떠나셨다. 사랑한단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엄마를 보냈다는 내 엄마의 통곡을 보면서, 왜 서로 손잡고 걸을 수 없게 된 뒤에 깨닫게 하는지 싶었다. 죽음은 자신의 실존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본질도 가르친다. 삶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부터 방구석의 개미 한 마리도 다시 보게 됐다.
시간은 다시 오지 않지만, 의미 없이 지나가지 않는다. 사소한 것이라도 흔적을 남기고 간다. 짓궂게도 할머니의 지병을 유일하게 물려받을 손녀가 되었지만 '나이가 들면 병과 친구가 된다'라는 정신승리법을 일찌감치 내게 전수해 주신 것과, 노란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떠올릴 딴딴한 추억거리 하나 남겨 주신 걸로 퉁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