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로부터 비롯된 행복 - (4)
사람은 언제나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뜨거운 사랑이나 돈독한 우애가 고독을 해결해 주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일시적으로 고독감을 느끼게 하지 않을 뿐 또다시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우리는 한 몸에 나 혼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언제나 삶의 무게를 홀로 견뎌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아니! 내가 혼자 있는데 어떻게 외롭지 않을 수 있나?’라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독이라는 것은 정신에 관한 이야기이지 물리적인 고독이 아니다. 당연히 사람이 혼자 집안에 있으면 고독한 느낌 정도는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느낌이어야 하지 진짜로 난 외로운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면 안 된다.
사람은 언제까지나 정신력으로만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폐단을 고려한다면 어떤 방면으로는 고독이 나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뒤에서 욕하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매장하려 노력하고 쓸데없는 과도한 허례허식을 차리고, 음해는 기본이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끼리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서로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대접 안 해주면 무시한다 착각해 혼자 화내는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는 폐단과 악습이 인간 사회에 판을 치고 있다. 생업을 위해서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 외의 일에서는 고독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많을까 사회 속에서 얻는 이득이 많을까. 과연 이런 사람들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이러한 군중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그건 괭장히 특이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한쪽 발은 군중에 한쪽 발은 고독에 두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지 그렇다고 항상 혼자 지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람은 사회가 없으면 살아가기 굉장히 힘들기 때문이다. 군중 속에서 살아가되 자신을 위한 고독한 도피처를 마련해두어야 한다. 그곳이 고독한 장소라면 더 좋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정신 한편에 자신만의 도피처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항상 우리는 고독한 개인과 붐비는 사회 중간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군중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고독에 발을 걸치고 있어야 하고, 사회가 나를 매장하려 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사회에 일부 몸을 담그고 있어야 한다. 나의 자아를 위하여 지나치게 고독을 즐기려 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사회 속에만 파묻혀 있어도 안된다.
유난히 고독감을 잘 느끼고 유달리 고독 속에 있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드는데, 도대체 성찰은 언제 이루어지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어떠한지 그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내가 처해있는 객관적 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내가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일까 통찰해보고, 내가 잘못한 건 무엇이고 잘한 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시간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도대체 이러한 시간을 갖지 않고 시류에 편승하는 삶을 지내봤자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그저 남이 살고 있는, 군중이 살아갈 뿐인 삶을 모방해서 사는 삶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개인은 군중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군중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과 그저 속해있을 뿐인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전자는 그들에 속하되, 그들을 뛰어넘었고 후자는 그들에 속해만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손해를 보더라도 내가 손해 보는 것은 막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도 나는 위기에서 일찍이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안목은 군중 밖에서 군중을 지켜볼 때 생겨난다. 그리고 군중 밖에 있다는 말은 곧 그가 고독하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결국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고독이 주는 이점을 제대로 살린다면 고독은 오히려 자신의 발전에 큰 보탬이 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고독이 가져다주는 이점을 생각하고 스스로 고독 속으로 들어가야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된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