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부부 관찰 예능프로를 보게 되면 나는 희한하게 그 내용 자체보다 부부의 '말본새'를 유심히 보게 된다. '말본새'라고 쓰고, '말뽄새'라고 과한 악센트를 넣어서 표현하게 되는 그 단어.
"야~"
"니가~"
"니가 이래서... 저래서..."
카메라가 돌고 있는 와중에도 저 정도면, 평소엔 얼마나 서로에게 말을 막 할까 라는 생각이 드는 포인트가 많다. 가장 아껴줘야 할 가까운 부부 사이에서 상대방에 대한 예의란 찾을 수가 없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배우자에게 그런 말뽄새로 말하면서도 남한테는 본인 쓸개, 간을 다 내어 줄 듯 세상 싹싹한 사람이 많다.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데 제일 가까운 배우자에겐 필터링이 없나 보다.
왜 그럴까?
분명 연애 때는 그 정도는 안 그랬을 텐데 말이다. 말본새는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는 인격이기에 갑자기 바뀌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함께 할 부부라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자 김수현의 책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글에 나오는 글귀가 생각난다.
그만두면 끝일 회사 상사에게
어쩌다 마주치는 애정 없는 친척에게
웃으면서 열받게 하는 빙그레 썅년에게
아닌 척 머리 굴리는 여우 같은 동기에게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더는 감정을 낭비하지 말자
마음 졸여도, 끙끙거려도, 미워해도
그들은 어차피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 지나가는 사람들한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예쁜 말을 한다. 인생에 지나가는 그들에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친절을 베푼다.
지난 주말은 아이 둘 맡겨놓고, 큰맘 먹고 남편과 강원도 속초 설악산을 다녀왔다. 목표는 울산바위!
해발 873M이니 서로 의지하면서 올라야 하는 거리. 서로 의지 한다기보다는 내가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올라야 하는 거리와 높이. 쉬지 않고 한 시간 정도 오르니 자연스레 서로 말이 없어진다. 남편은 그저 한 번씩 잘 올라오는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뒤쫓아 오르는 나를 다독이며 오른다. 내가 지친다 싶으면 얼른 물 한 모금 내어 주고 내 뒤를 잇는다. 막판에는 산 정상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계단의 연속이었다
목젖 위에선 육두문자 방언이 곧 터질 듯하였으나, 조금만 더 힘내 보자며 서로 의지하며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저 멀리 속초 앞바다가 보이는 울산바위 정상. 꽤 기분이 좋았다. 내려오는 길엔 설악산 계곡물에 발도 담가보며 우리가 저길 올라갔다 왔다며 뿌듯해했다. 우리 한주의 피로는 몇 시간 같은 목표. 등산이라는 미션 수행으로 풀었다. 다녀와서 서로 뭉친 다리 풀어주며 우리는 얘기한다.
"당신 덕분에 내가 울산바위까지도 올라가 봤네"
"당신 덕분이지. 다음 달엔 우리 칠갑산 가볼까?"
우리는 연애 때부터 현재까지 아무리 5살 차이 나는 부부사이라도 "야" "너" 같은 어휘는 쓰지 않는다. 누구보다 존중하며 대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런 의미로 결혼하면서부터 내 핸드폰엔 남편의 번호는 늘 이렇게 저장되어 있다.
♡복댕이 내 남편♡
그리 저장해 두니 남편에게 전화가 올 때마다 그 사람과 늘 좋은 일만 일어날 것만 같다.
비록 장시간 산을 타서 종아리 근육은 뭉쳐 버렸지만 서로의 따뜻한 말 한마디로 산행 피로는 이미 다 풀려 버렸다. 그저 부부간에 "당신 덕분에"라는 그 따뜻한 말 한마디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