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퇴근해서 온 남편이 급하게 씻고 나오자마자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한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수화기 너머로 살짝 들어보니 일과 관련된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콧김을 잠시 멈추고 통화내용을 파악해보니 어떤 거래업체 직원이 남편의 아랫 직원에게 뭔가 함부로 대한 내용으로 남편이 상대에게 확인을 하고 따지려는 대화이다.
조용히 듣고 있어 보니 나는 남편의 언성이 높아지지 않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남편은 여러 근거를 들이밀며 너무나 차분하게 전화 너머의 상대를 입으로 조곤조곤히 조지고 있다. 몇 분을 그렇게 통화를 이어나가는데 언성을 높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거래처 직원이 너무 죄송해하며 남편에게 사과를 했고, 개인적으로 그분께 직접 사과하겠다고 했다. 이 와중에 옆에서 숨죽이며 내용을 듣는 나는 남편의 그 모습과 말이 왜 이리 심쿵하던지...
화를 내지 않고도, 목소리 톤이 높아지지 않고도, 말이 장황하지도 않으면서 너무나 분명하고 카리스마 넘치게 본인의 의사를 전달하고 본인의 아랫 직원을 보호했다.
어찌 보면 나를 개똥으로 보고 함부로 대한 거래업체 직원에게 이렇게 먼저 나서서 조리 있게 따져주는 직속 상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도 생각했다. 아랫 직원이 누군가에게 그런 기분 잡치는 일이 있더라도 나를 위해 싸워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도 전쟁터 같은 회사생활이 가슴 한편엔 든든한 마음이 들겠다 싶었다. 남편이 너무 지혜로워 보였다.
그런 통화 후 빠르게 저녁식사를 하고 남편과 동네 산책을 했다. 동네 산책 중에 들어간 집 근처 쇼핑몰 안에 설치되어있는 기린 포토존 앞에서 남편에게 장난스러운 말을 건넸다.
"여보! 사진 찍어 줄 테니 쪼~~~오기 기린 앞에 서봐!"
했더니 군소리 없이 마누라가 시키는 대로 가서 선다. 더 나가서 핸들 돌리는 시늉까지 하며 사진 찍어 대는 나를 웃긴다. 아까 퇴근 후 통화와는 사뭇 다른 모습. 일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나만 아는 모습.
밖에서는 그리 카리스마 넘치고 정확하게 행동하는 남편이지만, 집에서는 아내가 하는 어떤 갑질(?)에도 토를 달지 않고 늘 웃으며 응해준다. 사실 어떻게 보면 내게 늘 져준다. 내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늘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은 사람이다. 살면서 머가 중요한지, 우선순위인지를 아는 사람 같아서 카메라 앞에서 핸들 돌리고 있는 그 장난기 어린 모습이 40대 중년 아저씨지만 아까 통화와 너무 대비가 돼서 귀엽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며칠 후 친정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친정엄마는 며칠 전 사위한테 온 카톡이라면서 남편이 보낸 카톡을 내게 보여주며 깔깔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