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맛, 미역국과 삼계탕
“기어이 오늘이 오고야 말았군.”
오늘은 김장하는 날. 내가 친정집을 찾는 날 중에 가장 두려운 날이다. 친정집에 들어서자마자 마당 한가득 절임 배추 박스와 무, 갓, 쪽파 등 온갖 김장 재료들이 나를 먼저 맞이한다.
“오늘 함께할 대결은 바로 김장입니다!”
어느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볼 법한 비주얼에 나는 순간 압도될 수밖에 없다. 부디 오늘 저녁에 내 허리가 안녕하길 바라며 비장한 마음으로 빨간 고무장갑을 단단히 고정시켜 본다. 김장 담그기가 처음도 아닌데, 약해진 내 몸 때문일까? 약한 건 내 마음일까? 김장은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김장하면서 1년 새 나의 약해진 체력의 한계를 경험하며 나이 듦을 철저하게 실감하곤 한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엄마를 도와 김장을 담그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아서 고무장갑을 끼고 엄마 곁에 앉았다. 대가족이어도 집안 식구들 그 누구도 엄마를 도와주질 않으니 혼자 애쓰는 엄마가 안쓰러운 마음에 거들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집에서 직접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씻고를 반복하니 김장 준비만도 며칠이 걸렸다. 내가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깜깜한 그 밤에 엄마와 나의 김장 부업이 시작된다. 엄마는 무채를 만들고, 나는 쪽파를 다듬고, 마늘껍질을 까며 그렇게 김장하는 날을 맞이한다. 거실 한복판에는 새빨간 김장매트를 깔고 그 위에 김치 양념을 가득 쌓아놓은 채 엄마와 나는 한번 앉은 상태에서 몇 시간이고 김치통을 하나둘 채워갔다. ‘난 김치 이렇게 많이 먹지도 않는데! 도대체 누굴 나눠주려고 이렇게 많이 하는 거야?’ 내 마음속에서는 불만도 하나둘 쌓여간다. 마음 가득 쌓인 불만이 폭발할 즈음, 김장은 마무리된다.
올해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김장해야 하는 양은 작년과 동일한데, 문제는 일꾼이다. 얼마 전 골다공증의 여파로 척추 골절상을 입은 친정엄마를 대신해 올해의 김장판에 등장한 선수는 나와 올케. 허리를 굽힐 수 없는 엄마는 허리에 깁스를 한 상태로 우리 곁에 서서 하나하나 알려주기 시작했다. 엄마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재료를 쏟아붓고, 버무리며 연신 간을 맞춰본다. 엄마가 직접 버무리지 못해 엄마의 손맛 자체는 덜할 수 있어도 엄마의 레시피는 엄마만의 김치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참 희한한 건 계량컵이나 계량스푼 없이 봉지에서 대충 눈대중으로 탈탈 털어 넣은 재료들인데, 버무리면 엄마의 그 맛이 난다는 것! 엄마 눈은 자동으로 계량이 되는 AI 기능이 있나 보다. 역시 요리 장인은 다르다.
엄마는 요리를 참 잘한다.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나고 자란 엄마는 어릴 적부터 엄마의 외할머니 손맛이 담긴 요리를 즐겨 먹으며 자랐다고 한다. 요리를 기깔나게 잘하는 엄마의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엄마까지 대대로 이어진 요리 금손의 대물림이다. 어릴 적에 먹어보았던, 맛있던 그 맛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능력을 가졌으니 가히 요리를 못할 수가 없다.
또 우리나라 중앙에 위치한 충청도의 이점 덕분일까? 엄마의 요리는 출신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호평 세례를 받기 일쑤다. 엄마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교회에서 20년 넘게 교회 주방 팀에서 봉사했다. 매주 엄마가 만든 음식은 누가 먹어도 엄마가 만든 메뉴임을 알 정도로 탁월했으며, 모두의 입맛에 안성맞춤이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입맛을 하나의 간으로 맞추는 엄마의 요리 실력은 특별했다.
올해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흑백요리사>에 엄마가 출전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엄마의 요리라면 청경채의 익힘 정도와 얇은 근막으로 까다롭게 평가하던 심사위원의 입맛도 사로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