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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聲之語(무성지어)

소리 없는 말

by 현루


無聲之語(무성지어)

소리 없는 말


雪影深窗落 (설영심창락)
눈 그림자가 깊은 창가에 내려앉고

寒風止後聞 (한풍지후문)
찬바람 멎은 뒤에야 들리는 작은 숨결

筆端無語立 (필단무어립)
붓끝은 말없이 조용히 서 있고

心底自成文 (심저자성문)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 글이 이루어지네


해석


겨울 창가에 쌓인 눈빛은 말이 없지만 모든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바람이 멈춘 순간 들리는 고요한 숨결 속에서, 작가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합니다.


붓끝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지만, 그 침묵 속에서 문장은 다져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단단한 뜻 하나가 스스로 형상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즉, 소리 없는 시간은 사유를 만드는 은밀한 공간이며, 작가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글의 근원을 듣게 됩니다.


전체 해설


《무성지어(無聲之語)》는 말이 사라질 때 오히려 가장 큰 언어가 태어난다는 역설을 주제로 합니다.

첫 구절의 눈 그림자는 ‘고요한 세계’를,

둘째 구절의 바람이 멎은 뒤의 숨결은 ‘침묵 뒤의 미세한 진동’을,

셋째 구절의 머뭇거리는 붓끝은 ‘창작의 막힘’을,

넷째 구절의 스스로 이루어지는 글은 ‘내면의 문장’을 각각 나타냅니다.


이 시는 겨울의 정적을 통해 ‘글이 아닌 마음이 먼저 쓰여야 한다’는 창작의 태도를 드러냅니다.


특히 침묵의 시간은 공백이 아니라, 생성의 밀실이며, 작가에게 가장 깊은 문장은 언제나 내면의 침묵을 통과한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


이 작품의 핵심은 “침묵이야말로 작가의 언어”라는 사유에서 출발했습니다.

겨울의 고요는 외면적으로는 정지이고 멈춤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생각이 응축되고 감정이 가라앉으며, 말보다 큰 말이 형성되는 시간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말하지 않는 순간, 쓰지 못하는 순간, 멈춰 서 있는 순간이 사실은 가장 충만한 창작의 과정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가는 세상을 향해 많은 말을 쏟아내는 존재가 아니라, 먼저 들을 준비가 된 사람, 고요 속에서 진짜 문장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성지어(無聲之語)’는 결국, 소리 없는 순간이야말로 마음의 본래 언어가 솟아오르는 자리라는 사실을 부드럽게 일깨우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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