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의 감시자들

by 콩코드


우리는 마치 아무런 감시도 받지 않는 듯 살아간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도, 법의 손이 미치지 않는 사각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정해진 방식'대로 말하고, 행동하며, 반응한다.


그 누구도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너무도 잘 안다. 옷차림에서 말투까지, 표정에서 침묵의 길이까지. 그 기준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며, 익명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누군가의 시선처럼 작동한다.


고요한 공간일수록 감시는 더 강력해진다. 그 감시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시작된다.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내가 너무 나서는 건 아닌지, 지금 이 말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하진 않는지, 침묵이 지나쳐 무관심처럼 보이진 않는지.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시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를 의식한다. 눈빛 하나, 리액션 하나, 말의 속도까지 — 우리는 보이지 않는 기대에 맞춰 스스로를 조율한다.


그게 질서일까, 감시일까.

배려일까, 아니면 자기 검열일까.


문제는, 그 감시에는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제도나 기관에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분위기, 자발적으로 순응한 침묵이 결국 감시의 형태로 우리를 되감싼다.


고요는 단순히 소음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건 ‘이상하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정적이며, ‘불편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감내하는 분위기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다듬는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공감하며, 적당히 모른 척한다. 그 모든 ‘적당함’의 이면에는 고요 속의 감시자들이 숨어 있다.


그 감시자는 어쩌면,

타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심층학습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누군가의 감시 없이도 스스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있다면,

그건 자유일까요, 아니면 내면화된 통제일까요?


이 글과 연결되는 아래의 개념들을 함께 생각해 보면,

‘고요 속의 감시자들’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셸 푸코의 ‘파놉티콘’과 자기 통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감시란 더 이상 외부에서 강제로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되어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는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원형 감옥 파놉티콘(Panopticon)을 예로 들며,

“언제든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감각이

사람들을 가장 강력하게 통제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감시가, 가장 효과적인 감시라는 뜻입니다.


→ 핵심 개념: 자기 감시, 규율 권력, 통제의 내면화


‘타인의 시선’이라는 무언의 규범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은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우리는 마치 무대 위 배우처럼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연출하고 조율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우리의 많은 행동은 명확한 규칙보다는, 사회가 기대하는 분위기와 눈치 속에서 결정됩니다. 즉, 우리는 서로를 직접 감시하지 않지만, 감시당하지 않기 위해 서로를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 관련 개념: 역할 수행, 공적 자아, 일상의 연기


디지털 시대의 보이지 않는 감시


오늘날 우리는 SNS, CCTV, 스마트폰, 알고리즘 등

수많은 ‘비인격적 감시’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감시는 단순히 위치나 활동만을 추적하지 않습니다. 감정, 취향, 관심사까지 수집하고 예측합니다. 결국 우리는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항상 ‘보일 수 있는 상태’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게 됩니다.


→ 참고 개념: 감시 자본주의(Surveillance Capitalism), 데이터 권력, 투명성 강박


함께 생각해 볼 질문


나는 과연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말하거나 행동해 본 적이 있을까?


내 감정을 숨기거나 조절할 때,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지금의 ‘조심스러움’은 나의 성숙함일까, 아니면 내면화된 규범의 결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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