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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보라 Oct 30. 2022

암 유전자 검사

브라카(BRCA 검사)

왼쪽 가슴에도 암이 생겨 '양측성 암 환자'가 되자, 파격적인 95% 할인 혜택이(?) 쏟아졌다.  '양측성 암 환자'는 암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질 확률이 높은 고위험군에 속하기 때문에 산정 특례 대상이었다.  덕분에 검사비의 5%만 내고 유전자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대한민국 의료 제도에 감사를!)     

산정 특례 덕분에 200만 원에 가까운 유전자 검사 비용 중 12만 원만 지불.


        

일명 '브라카'(BRCA)라고 부르는 이 유전자 변이 검사는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 때문에 유명해졌다. 가족 중 유방암, 난소암 환자가 있던 졸리는 브라카 검사에서 유전자 변이를 발견했고, 암 예방 차원에서 유방 절제술을 받았다.     

브라카 검사 안 내지


만약 나도 이 검사에서 돌연변이 유전자가 나온다면?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지난번에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의사 선생님의 '~ 할 수도 있고' 시리즈가 떠올랐다.  양쪽 가슴 다 전절제할 수도 있고, 난소 제거할 수 있고, 자궁도 절제할 수 있고...  그게 다 이 검사에서 변이가 발견될 경우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게다가 변이가 나오면 내 직계 가족 중 여자들은 유전자 검사를 권유받는다. 그러면 엄마랑 여동생도 손에 손 잡고 함께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나 하나로 부족해 가족까지 줄줄이 달고 암 센터에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하자 없던 혈압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3월부터 괴롭히던 질염이 도통 낫질 않는다. 아랫배가 수시로 뻐근하고 찌릿찌릿. 나을 것 같다가도 다시 심해진다. 스트레스가 가장 큰 적이니 조심하라고 했지만, 종소리만 들어도 파블로프의 개가 침을 흘리듯 이 상황에서는 스트레스가 솟구칠 수밖에 없다.    

  

오후에 브라카 검사가 있어 웬만하면 하루에 병원을 두 곳이나 가고 싶진 않았지만, 너무 아파 집 근처 산부인과를 방문했다. 오전엔 부인과, 오후엔 암센터. 코로나 터지고 2년 동안 한 번도 간 적 없던 병원을 올해 다 순례하고 있는 중.  

    

암에 걸리고 나니 작은 아픔에도 큰 아픔으로 화답하는 버릇이 생겼다. 상상력이 풍부해졌다. 질염을 확장해서 자궁 경부염이나 골반염을 의심하고, 자궁 경부암까지 세계관을 확장했다. 산부인과 샘에게 '혹시 골반염인가요?'하고 물으니 '그랬으면 그렇게 멀쩡히 걸어 들어오실 수 없었을 껄요.' 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미소 지으신다. 선생님 말이 맞았다. 단순 질염으로 약만 처방받았다.       


오후 14:35. 유전 상담 클리닉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연구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동의서를 건넸다. 유전성 유방암에 관한 임상 연구 중인데, 실험을 위해 다른 사람보다 내 피를 '조금 더' 뽑아도 되는지 물었다.  남들은 헌혈도 하는데 유방암 치료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그깟 피 좀 더 뽑는 게 무슨 대수랴 싶어 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진료실에 들어가 준비한 '가족 관계도'를 제출했다. 조부모 포함 직계 가족의 가계도를 그려 출생 연도, 나이, 사망 사유를 적어오라고 사전에 미리 안내를 받았다. 가족 중 암 환자가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가족 중 암 환자는 외할머니 딱 한 분이었는데, 갑상선 암이셨다. 그 외에 우리 가족, 친척 들 중에는 암 환자가 한 명도 없다.  새 언니(사촌 오빠 부인)가 10년 전에 유방암에 걸렸었지만, 나랑 피가 섞인 가족은 아니니  우리 가문에선 내가 최초로 유방암의 땅을 밟은 개척자인 셈이다.(pioneerㅠㅠ )      


의사 선생님은 갑상선 암이 워낙 흔한 암이라 유전과는 상관이 없을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오전, 오후 병원을 한 바퀴 돌며 피를 헌납하고 오니 온 몸이 축 처졌다. 너무나도 심하게 내  취향인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 하나'에서 주인공 나희도(김태리)가 백이진(남주혁)한테 망신을 당한 후, 쪽 팔린 마음에 이렇게 외친다.      


"내일 지구 멸망해 버려!"     


희도야, 지금 내 마음도 그래. 내일 지구가 없어져도 괜찮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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