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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일제의 그림자와 기억

제2부 역사와 문화가 블렌딩된 도시

by 규아

군산은 스스로 일어선 도시였다.

금강의 물줄기를 끼고, 서해의 바람을 맞으며,

비옥한 들과 바다가 동시에 품어진 땅.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살 만한 곳’이라 불렀다.

풍요로운 물자와 항구가 있었기에

근대라는 시대의 물결 속에서

스스로 번성할 수 있었던 도시였다.


일본으로 갈 군산항의 쌀가마니

하지만 그 물결은 강제로 방향을 틀었다.

1899년, 이 땅은 개항의 이름으로 열렸고,

풍요는 곧 수탈의 표적이 되었다.

그때부터 군산은 일제가 남긴 그림자와,
그 속에 스며든 기억을 안고 살아야 했다.


갯벌과 갈대밭이던 해안가에는 낯선 표지판이 세워졌고,

신작로에는 본정통, 명치정, 전주통 같은

이방의 말이 들어섰다.

도시는 식민의 이름을 입었다.


일본은 군산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군산이 가진 풍요에 기대어 도시를 짰다.

옥구평야, 김제평야에서 모아든 쌀은

뜬다리 부두에 실려 바다 건너로 떠났고,

‘쌀의 군산’이라는 이름은

자랑이 아니라 상처로 남았다.

하루에도 몇 척씩, 일본 배가 드나들며

이 땅의 곡식을 가득 싣고 떠났다.


그 중심에는 해망굴이 있다.

일제는 돌산을 깎고, 굴을 뚫었다.

당시 군산 시내와 수산물의 중심지인 해망동,

미곡을 반출하던 군산 내항을 잇는 그 터널은,

수탈의 통로였다.

구 군산세관

군산은 쌀을 빼앗겼고,

거리의 이름을 빼앗겼고,

사람들은 번화한 시가지에서 밀려나

창성동, 개복동의 외곽으로 쫓겨났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일본인의 사택과 관사,

은행과 사찰,

그리고 메이지의 이름을 단 거리였다.


그들은 이 도시를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해방 직후, 재산을 지키기 위해

귀화를 신청한 일본인 지주의 이야기는

그 욕망의 끝을 말해준다.


그러나 도시의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수탈은 상처였지만,

그 속에서도 항거는 이어졌다.


해망굴

학생,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 되어

이들에 맞서 저항했다.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

옥구농민항일항쟁, 항일노동운동.

갖가지 억압 속에서도 이 도시는

꺼지지 않는 불씨를 뿜었다.


지금의 군산 원도심.

내항을 중심으로 한 짧은 거리에도

수십 개의 근대 건축이 남아 있다.

구 조선은행, 동국사, 신흥동 가옥, 해망로의 부두.


하지만 그 건물들은

단지 ‘이국적 풍경’이 아니라

군산이 견뎌낸 시간,

겹겹이 쌓인 이야기의 껍질이다.


일제가 세운 절, 동국사에 있는 소녀상

해망로를 걷다 보면

오래된 벽돌 틈으로 바람이 분다.

시간이 머문 자리마다

도시의 상처와 체온이 포개져 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깎이고 뚫린 길이었지만,

또 누군가의 삶이

그 길 위에 다시 피어났다.


군산은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

외면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은 채

삶으로, 문화로 끌어안아

고유한 결로 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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