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시간의 무늬가 새겨진 도시, 군산
군산의 시간이 조선을 건너 근대로 들어서자, 바다가 남긴 깊은 상처 위에 또 다른 무늬가 새겨졌다.
부산·원산·인천·목포·진남포·마산에 이어 1899년에 개항한 군산. 이곳은 이미 곡식과 바다가 만나는 교역의 길목이었다. 그러나 개항의 바람은 곧 외세의 착취와 겹쳤다. 일제는 군산을 ‘갈대만 흔들리던 황량한 어촌’이라 불렀지만, 이는 거짓이었다. 여기에는 이미 수만 명이 살며 곡식과 교역으로 활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약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서곡에 지나지 않았다.
세관과 경무서, 감리서가 세워지고, 곡식 창고가 내항을 따라 들어서면서 군산은 식민 수탈의 전초지가 되었다. 농민의 땀으로 거둔 쌀은 부두로, 선창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흘러갔다. 풍요의 길은 착취의 통로가 되었고, 바다는 상처의 물길이 되었다.
바다를 따라 부두와 역, 정미소와 양조장, 미곡상 간판이 늘어서고, 전군가도와 철도, 정기 항로가 새 질서를 가져왔다. 1914년 군산부가 설치되고, 자혜의원·학교·수도 같은 근대 시설이 세워졌으나 빛은 한쪽으로만 기울었다. ‘정(町)’과 ‘동(洞)’이 갈라놓은 경계가 차별이 만들어놓은 삶의 격차였다.
곡창의 곡식은 산처럼 쌓여 바다를 건너갔다. 구마모토·불이·궁기·천기… 이름을 달리 한 대농장은 소작을 늘렸고, 많은 자작농은 소작농으로 내려앉았다. 많은 이들이 부두와 철길로 몰려들어 낮엔 하역, 밤엔 좁은 숙소 불빛 아래 신음 같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삶은 멈추지 않았다. 영명학교와 학생들로 번진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고, 노동과 농민의 깃발이 부두와 정미소, 농장 울타리 위로 펄럭였다. 옥구의 소작쟁의는 단지 농민들만의 호소가 아니라 시대 전체의 울림이었다.
1930년대, 전쟁의 기계가 굴러가자 군산은 병참의 지도로 다시 그려졌다. 방직과 화학 공장, 화력발전, 방공호와 토지 구획. 도시는 어둠에 대비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 군산은 어둠을 빛으로 반짝이게 했다. 신흥동 일본식 가옥, 구 군산세관, 구 조선은행·제18은행 건물, 그리고 부잔교. 수탈의 그늘이 드리운 건축들조차 오늘날에는 군산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문화유산이 되었다.
군산은 도시 특유의 포용력으로 아픔을 품어내며, 또 다른 문화를 길어 올렸다. 부두의 비린내, 정미소의 뜨거운 김, 은행 벽돌의 냉기, 학교 운동장의 함성…. 이 모든 감각이 겹겹이 쌓여 도시의 결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결은 오늘 우리가 걷는 길 위에서 여전히 미세하게 반짝인다.
바다가 낸 상처는 여전히 도시 곳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상처는 파도에 반짝이며, 군산의 시간을 증언한다. 군산은 상처마저 빛으로 길어 올려, 현재의 ‘군산다움’으로 블렌딩 해냈다.
#군산 #군산여행 #군산역사 #군산근대 #군산근대유산 #군산항구 #군산내항 #군산세관 #부잔교 #동국사
#군산시간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군산 #군산여행 #항일운동 #일제 #일제착취 #일제수탈 #일제항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