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풍요의 길목, 침탈의 예고

제3부 시간의 무늬가 새겨진 도시, 군산

by 규아

군산의 시간은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 또 다른 무늬를 남겼다.


그 중심에는 임피가 있었다. 오늘날 고요한 들녘으로만 보이는 임피는, 당시 옥구와 회미, 만경까지 거느린 중심 고을이었다. 이곳에 세워진 조운창, 곧 군산창에는 백성들이 바친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강과 바다를 따라 개경과 한양으로 실려 나갔다. 조운선이 오가던 물길 위에서 군산은 이미 호남의 곡창을 책임지는 물류의 도시였다.


그러나 풍요는 언제나 침탈의 표적이 되었다. 군산 앞바다는 왜구의 검은 돛배가 드나들던 길목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옥구에는 군산진이 설치되고 수백 명의 수군이 배치되었다. 봉화가 오르고, 파도 위로 화살이 날아갔으며, 바다는 늘 긴장으로 출렁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수군의 숫자는 줄어들었고, 그 틈새로 바다의 위협은 끊이지 않았다.

선유도에 있는 군산진 절제사비.jpg 선유도에 있는 군산진 절제사비(출처: 디지털군산문화대전)


1597년, 이순신 장군은 명량의 기적 같은 승리 직후 단 하루의 쉼도 없이 북쪽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바로 고군산도. 군산창의 곡식이 왜구의 손에 넘어간다면 조선은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고군산도에 열흘을 머물렀던 기록이 남아 있다. 군산의 바다는 단순한 바다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의 생명을 지탱하는 곡식길이었다. “若無湖南 是無國家也(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이 말은 곧 군산이 지닌 무게를 보여준다.


하지만 풍요의 길목은 곧 침탈의 예고이기도 했다. 군산 앞바다에는 조운선만이 아니라 사신선과 교역선이 오갔고, 그 물결 속에서 청자와 도자기가 흘러왔다. 지금도 십이동파도와 비안도, 야미도 해역에서 건져 올린 수천 점의 해저유물은 그 시대의 교류를 증언한다. 그러나 발산리에 옮겨와 남은 석등과 석탑은, 문화가 번영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약탈의 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찬란한 시간 속에는 이미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군산창이 있던 자리.jpg 군산창이 있던 자리(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군산의 조선은 풍요와 교류, 그리고 침탈의 불안이 겹쳐 새겨진 시기였다. 군산창에 쌓인 곡식은 백성의 땀과 나라의 힘이었으나, 언제나 누군가의 탐욕을 불러왔다. 그 풍요는 한 시대를 지탱했지만, 동시에 다가올 근대의 상흔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러나 군산은 상처만을 간직하지 않았다. 침탈의 기억조차 품어내며, 또 다른 문화와 삶의 무늬로 바꾸어냈다. 그래서 군산의 풍요는 곡식의 무게를 넘어 외세의 바람 속에서도 자신만의 결을 만들어낸 도시의 힘이었다. 그 힘을 곧 근대와 오늘, 그리고 내일로 이어질 군산만의 얼굴이 되었다.


오늘도 바다는 끊임없이 물결치며, 그 오래된 무늬 위에 새로운 시간을 새겨 넣는다. 군산은 그렇게, 상처와 풍요가 뒤섞여 더 단단해진 도시로 다음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군산 #블렌딩시티 #군산진 #군산창 #이순신 #명량대첩 #난중일기 #약무호남 시무국가 #해저유물

keyword
규아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210
이전 14화진포의 불빛, 고려의 군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