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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간힘, 슬픔을 바라보는 일

안간힘 – 유병록(상)

by 규아

유병록 시인의 첫 번째 산문집 「안간힘」을 읽었다. 세상을 등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우리 삶을 표현한 것 같아 마음이 끌렸다. 다른 이들의 인생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공감과 위로를 얻고 싶었지만 첫 장을 넘기자마자 바로 덮고 싶었다. 그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이 책은 어린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뒤 슬픔을 버티고, 슬픔과 함께 살아온 기록이다. 아들의 죽음은 작가 개인에서 시작해 아내, 아버지, 어머니, 장인어른, 할아버지, 친구 아들에까지 퍼지며 각각의 관계와 감정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결국 그는 ‘안간힘을 내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이야기를 닫는다.


책의 첫 장면은 치욕이다. 아들의 장례식 중에도 밥이 생각나고, 담배가 떠오르고, 잠을 쏟아지는 자신을 작가는 치욕스러웠다고 적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는 깨닫는다. 치욕에서 힘이 날 때도 있으며, 더 잃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그는 젊은 날 자신도 모르게 불행을 전염병처럼 여겨 세월호 유족처럼 고통을 겪은 이들을 은근히 회피한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며 반성한다.


오랜 슬픔 속에서 울음을 억누르다 아내와의 갈등이 극에 달한 뒤에야 그는 알게 된다. 눈물을 참은 것이 오히려 갈등의 씨앗이었음을.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이제는 실컷 울자.


회복을 위해 붙잡은 책에서 박완서 선생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고 또다시 멈칫한다. 박완서 또한 인간성을 의심할 만큼 혹독한 고통을 지나왔다는 사실. 우리를 집어삼킬 것 같은 고통도 결코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 누군가 이미 그 길을 지나가며 남긴 글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그는 다짐한다. 고통을 먼저 겪은 이들의 글에서 위로를 얻고, 슬픔 속에서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겠다고.


이어지는 장면들은 둘만의 식사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보는 아내에게 서운함을 느끼던 순간, 또 그런 그에게 불만이 쌓여있던 아내의 마음이 교차하며 드러난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아직 서로를 감싸 안을 만큼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사랑은 상처의 반대편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지나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간다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다시 부끄럽다고 여겼던 농부 아버지, 남진 공연을 처음 본 어머니의 떨림, 단둘이 있으면 쑥스러웠던 장인어른, 별에게 “안녕”이라고 진심 어린 인사를 하던 다섯 살짜리 친구 아들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집안의 세찬 바람을 다 맞겠다며 본인의 묫자리를 험지로 정해두었지만 결국 양지바른 곳으로 묻힌 할아버지, 또 할아버지 무덤 ‘슬하’에 아들의 유골을 뿌리던 장면으로 이어진다.


그는 더 확장하여 자신의 학창 시절, 직장 생활, 대인 관계를 돌이켜보며 스쳐 간 타인들에 대한 소회를 담는다. 어린 시절 뒤란에 있던 우물을 떠올리며 누구에게나 깊은 마음의 우물이 있다며 말한다. 서운함이 들 때면 저 사람의 우물도 깊을 것이라고 믿고, 다만 그 우물의 물을 길어 올리지 못할 뿐이라는 이해를 건넨다. 짧은 소설들처럼 흘러가는 그의 기억들 속에서 삶과 죽음, 슬픔과 화해가 작은 파도처럼 번져간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사람이 달라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강력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라고. 작가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몇 번의 죽음 때문이었다. 용산역 앞‧진도 앞바다 사건 등 이름 모를 타인들의 죽음, 할아버지처럼 존경하는 분의 죽음, 그리고 아들의 죽음….


행복은 사라졌지만 그는 보람이 있는 삶을 살기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 결심조차 어쩌면 이기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살아내겠다고, 죽음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면 변화란 애초에 가당치도 않다고 조용히 덧붙인다.


나는 작가의 이 담담함에 끝까지 책장을 덮지 못했다. 그의 슬픔을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감정이 아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슬픔을 바라보는 일은 어쩌면 나의 슬픔을 다시 바라볼 준비를 서서히 시작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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