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 / 신대철
[ 박꽃 – 신대철 ]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은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까만 밤과 하얀 박꽃의 선명한 색 대비가 눈앞에 그려지는 시다. 칠흑 같은 한밤중, 고요한 정적 속에서 박꽃이 하얗게 핀다. 밤은 박꽃이 필 동안 그 어두움과 조용함을 지켜내기 위해 애를 쓴다. 적막한 순수 속에서만 본연의 아름다움이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의 세상은 늘 소란스럽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음해와 독설을 쏘아댄다. 혀끝의 침으로 상대의 약점을 찌르고, 뜬소문을 만들어 퍼뜨린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무리 지어 공격하는 담비들. 서로를 해치는 세상은 늘 시끄럽다.
하지만 밤이 오면 모든 것이 멈춘다. 웅웅 거리던 벌떼 같은 사람들은 잠들고, 침은 감춰져 뜬소문도 사라진다. 이들이 잠잠하니 담비들도 제집으로 돌아간다. 모두 가만히 있고, 왜곡과 모함이 들리지 않는다. 거짓을 섞은 채색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제야 있는 그대로의 소리가 들리고, 본래의 색이 보이는 밤이 된다. 그 새까만 정적 속에서 하이얀 박꽃이 피어난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첫 연은 박꽃과 밤의 선명한 색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 이미지를 불러온다. ‘박꽃이 필 동안 세 걸음 이상 물러서지 않는 밤’이라는 표현은 밤이 꽃의 순수를 지켜내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두 번째 연에서는 박꽃이 왜 밤에 피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온갖 군상들이 입을 다물고, 독설과 뜬소문이 잠들고, 몰려다니며 서로를 물어뜯는 행위들이 멈추는 때가 되어야 피어나는 꽃. 박꽃이 핀다는 것은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깨어나는 순수의 은유다.
박꽃이 피는 배경을 전개하다가 드디어 세 번째 연의 박꽃이 핀다는 한 줄에서 잠시 숨을 멈추게 된다. 그랬다가 마지막 연에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는 표현은 박꽃을 넘어, 감각의 회복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세상의 소란함에 우리가 놓쳐왔던 본질. 모든 것이 잠들고 제자리를 찾을 때, 비로소 들리는 ‘있는 그대로의 소리’. 그것은 순수한 감각의 부활이다.
시를 읽으며 몸속의 감각이 깨어났다. 책상에 앉아있는데도 흑과 백의 절묘한 조화가 눈앞에 그려졌고, 대낮의 소란스러움과 한밤의 정적이 뚜렷하게 대조되었다. 조심스럽게 봉우리를 틔우다 활짝 벌어지는 박꽃의 만개를 상상하며 숨을 죽였다. 그 속에 흐르는 물소리가 유난히 청아하게 들렸다.
시인은 어둠을 순수의 공간으로 재창조했다. 벌떼와 침이라는 날카로운 이미지로 세상의 혼탁함을 그려내고, 그 모든 소리가 잠든 밤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감각과 본질을 되찾게 한다. 단 몇 줄의 시로 독자의 마음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시인의 능숙함에 감탄이 절로 난다.
하루의 끝, 불을 끄고 앉아 창문을 열면 밤이 밀려온다. 낮 동안 쏟아낸 말들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식어가고 그제야 들려오는 소리. 세상의 소리가 온전히 들린다. 그 단순한 소리 하나가 내 안의 소음을 다독인다. 박꽃처럼, 나도 어둠 속에서야 비로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