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밥 한 그릇 에세이집
책을 덮자, 오래된 냄새가 났다.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배고파지면 꺼내어 먹던 종이박스 속, 곰팡이 핀 생고구마에서 풍기던 쿰쿰한 냄새. 뜨끈한 밥에 비벼 먹었던 미군 부대 ‘빠다’향도 은은히 배어 나왔다. 자라온 환경이 달라 떠오르는 음식은 다르지만, 신경숙 작가의 산문 「어머니를 위하여」에서 말하듯 나도 나이 들수록 어린 시절의 맛으로 돌아가고 있다.
‘맨얼굴’ 같은 맛이 좋다. 그 맛을 찾아 로컬푸드 직매장을 자주 간다. 밭에서 막 뜯어온 것에 비할 순 없지만, 직매장 채소에는 아직 햇살의 온기가 남아 있다. 운이 좋으면 몇 분 전 수확되어 아직 숨 쉬는 상추, 호박, 고추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신선한 재료는 소금만 뿌려도 맛있다. 양념이 많아지면 본래의 맛은 희미해진다. 당근이나 알배추 같은 채소는 생으로 먹어도 단맛, 짭짤한 맛, 고소한 맛이 그득하다. 그 본연의 맛을 놓치기 싫어서 여전히 집밥을 고집한다. 아무래도 식당 밥은 재료의 신선함을 조미료로 대신할 수밖에 없으니까. 혀에 닿는 순간 짠맛인지 단맛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맛, 그 단순함이 좋다.
요즘 사람들은 나물에 올리고당, 굴 소스, 참치액 같은 신종 양념을 넣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금, 설탕, 참기름으로만 간을 한다. 어릴 적 엄마가 이 세 가지로 쓱쓱 버무린 요리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가끔 조미료를 넣어야 할 때면, 옛것을 고른다.
‘몸에 나쁘다’는 미원, 뉴슈가, 빙초산의 세대가 만든 기억의 미각이 아직도 내 혀 끝에 남아 있다. 뉴슈가를 넣고 삶은 옥수수, 감자가 맛있고 빙초산을 뿌린 홍어회가 입에 감긴다. 세월이 한참 흘렀는데도 미각만은 기억을 잃지 않는다.
오늘은 문득 콩나물밥이 먹고 싶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 위에 참기름 향 가득한 간장양념을 싹싹 비벼 먹던 그때. 이모, 삼촌이라 부르던 동네 사람들이 한 밥상에 둘러앉아 콩나물밥의 김이 식기도 전에 후다닥 먹고는 다들 배를 두드렸다.
콩나물의 비릿한 향도, 푹 익어 느물거리는 질감도 맛있었다. 덜 벗긴 콩나물 껍질까지 고소했다. 뜨거운 쌀밥 속에서 콩나물 대가리가 꼬드득 씹히는 식감과 짭짜름한 양념장이 혀끝에서 한데 어우러질 새도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맛도 맛이지만 서로 수다를 떨며 먹는 통에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함께 모여 먹는 풍경도 어릴 때 먹었던 맛이리라.
인터넷에서 찾은 콩나물밥 레시피에는 소고기와 매실액이 추가되었다. 소고기의 구수함과 매실액의 달큼함이 여럿이 먹는 맛을 메꿔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그 맛이 나지 않으면 추억을 혀끝으로 더듬거려서라도 어린 시절을 먹어봐야겠다.